[단독]짐싸는 국책硏 고급두뇌들… 26곳서 5년새 1629명 이직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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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정부정책연구기관

요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금융전문가인 박사 A 씨가 조만간 자본시장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에 술렁이고 있다. 올해 들어 6월까지 11명의 석·박사급 인력이 연구원을 떠난 데 이어 A 씨가 추가로 이직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직한 기관이 규모나 처우면에서 ‘급이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아 남은 연구원들의 충격은 더 크다. KIEP의 한 박사는 “그만큼 국책연구기관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방증”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인력 유출에 속수무책인 국책연구기관


3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박맹우 의원이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26개 국책연구기관으로부터 제출받은 ‘퇴직자 현황’을 동아일보 취재팀이 컴퓨터활용보도(CAR)기법으로 분석한 결과 2010년 1월부터 2015년 6월까지 총 1629명의 석·박사 인력이 이들 기관에서 대학 등으로 이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년퇴직, 정규직 전환으로 인한 재입사는 제외한 수치다. 이직자는 2010년 252명, 2011년 263명, 2012년 315명으로 매년 늘다 2013년 287명으로 다소 감소했지만 2014년에 334명으로 다시 늘었다. 올해 상반기(1∼6월)에도 178명이 새 직장을 찾아 국책연구기관을 떠났다. 26개 기관의 석·박사급 인력 정원이 2300명 안팎임을 감안할 때 연간 이직률이 11∼14%에 이르는 셈이다. 1990년대 이 기관들의 이직률은 그 절반 수준이었다.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해야 할 30대 중후반 젊은 학자들의 이탈이 두드러진다는 점이 특히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과거에는 경력 10년 차 이상이 주로 이직을 했다면 최근에는 1∼5년 경력인 연구원이 전체 이직자의 절반을 차지한다. 특히 연구기관을 떠난 석·박사 1629명 중 30대가 52.3%(852명)로 절반이 넘었다. 국책연구소가 석·박사들이 경험만 쌓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이직하는 ‘훈련소’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경제적 이유에 지방이전이 결정타

옮겨간 직장이 확인된 퇴직자 591명의 이직처를 살펴보면 대학이 50.8%(300명)로 가장 많았다. 이들은 국책연구기관을 떠난 이유로 ‘대학만 못한 처우나 위상’을 들었다. 국책연구기관의 임금은 민간 대기업의 3분의 2 정도이고 공무원연금을 받는 공무원, 사학연금을 받는 대학교수와 달리 노후보장 수준이 낮은 국민연금 가입 대상이다. 30대 후반∼40대 초반에 대학으로 조기이직을 하는 이유도 사학연금을 받으려면 교수직 20년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된 환경도 이직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외환위기(IMF) 직후인 1998년 무렵부터 국책연구기관에 대한 정부출연금이 대폭 깎였고, 줄어든 출연금은 연구원들이 외부 연구용역을 수주해서 채우고 있다. 외부 연구용역을 경쟁적으로 따오다 보니 정작 연구 실적은 저조해졌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0∼2014년) 26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 1인당 국내외 학술지 게재 논문’은 평균 0.98건으로 1건이 채 안 됐다. 국제 전문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5년간 516편에 그쳐 전체 논문건수(6577건)의 7.9%에 불과했다.

이직 바람을 일으킨 결정타는 국책연구기관들의 지방이전이었다. 전체 석·박사 이직자의 92%(1495명)는 26개 기관 중 세종시 등 지방으로 옮겼거나 이전이 예정된 21곳에서 나왔다. 정부 일각에선 최근의 높은 이직률에 대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설명한다. 1990년대 이전 정부 주도로 모든 정책이 만들어지던 시대에는 국책연구기관들이 이를 지원하며 정책담론을 주도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회와 민간 쪽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면서 국책연구기관에 대한 정부의 의존도가 크게 감소했다는 것이다.

인력 조정에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해도 우수 인력의 이탈이 국책연구기관의 역량을 끌어내린다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용역을 준 연구보고서를 받아 보면 수준이 너무 낮아서 사무관들이 뜯어 고치기 일쑤”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국책연구기관이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책연구기관 내부에서는 기관의 역할이 중장기 정책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정부의 정책논리를 개발하는 하부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KIEP 출신의 C 교수는 “공무원들이 국책기관 연구원들을 아랫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 “최소한의 근무연수 확보해야”

전문가들은 연구원들의 이직을 줄이려면 임금, 복지혜택 등을 민간 수준에 맞춰 어느 정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정 부담 등을 고려할 때 당장 이들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하기는 어렵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입사 이후 최소 몇 년간 이직하지 않는 조건으로 석·박사 인력을 받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박맹우 의원은 “입사 이후 최소 몇 년간 이직하지 않는 조건으로 석·박사 인력을 받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며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의 정년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65세에서 61세로 감축됐는데 이를 원상회복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세종=손영일 scud2007@donga.com·김철중·홍수용 기자
#국책#두뇌#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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