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뿐… 人權이 뭔지도 몰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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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북한의 잃어버린 인권, 탈북자 60인의 증언
北의 비극은 현재진행형

한국에 온 지 1년 6개월째인 김민선(가명·50·여) 씨는 탈북을 시도하다가 붙잡혔던 2006년 겨울의 악몽을 아직도 떨치지 못한다.

그녀는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던 열흘 동안 한잠도 잘 수 없었다. 30분에 한 번씩 불려나간 그녀는 붙잡혔을 때까지의 행적을 종이 10장에 걸쳐 자세히 적어내야 했다. 반복되는 고통에 지친 김 씨는 “너무 고달파서 내가 안 한 것도 했다고 할 것 같았다”며 “난방도 안 돼 나중에는 손발이 얼어서 가지색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하루에 한 끼 제공되는 식사도 고작 두 숟가락이면 바닥이 드러나는 누룽지 물에 김치 두 쪽이 전부였다. 보위부에선 수감자들이 자살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젓가락을 안 주고 숟가락도 동그란 부분만 준다.

가족 중 탈북자가 있으면 더욱 심한 감시에 시달려야 한다. 김성진 씨(38)는 “가족이 먼저 탈북한 이후 1주일에 한 번이나 2주일에 한 번씩 꼭 당에 가서 자백서를 바쳐야 했다”고 말했다. 임해리(가명·39·여) 씨가 북한을 떠난 뒤 임 씨의 아버지(74)는 18일 동안 감금됐다. 임 씨는 “아버지 병이 위중해 거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풀어줬다”고 했다.

인권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조차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

무산광산에서 일했던 홍은경(가명·45·여) 씨는 어두운 갱에 들어가는 대신에 컨베이어벨트 작동상태를 관리하고 점검하는 조작실에서 일하기 위해 작업반장과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홍 씨는 “여자들이 돈이 없으면 다른 게 뭐가 있겠느냐”며 “내가 살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그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김혜숙(가명·44·여) 씨는 “1996년 4월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김 씨의 집에는 이미 5개월 동안 식량이 하나도 없던 때였다. 산에서 풀과 나무뿌리를 캐서 소금을 뿌려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어느덧 영양실조로 얼굴은 누렇게 변했고 노인과 아이들부터 죽음을 맞기 시작했다.

중국 남성들과 결혼한 탈북 여성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도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1998년부터 중국에서 6년간 숨어 지낸 뒤 강제 북송됐다가 다시 탈북한 이지영 씨(37·여)는 중국 정부가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다.

그녀는 2000년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지만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 남성과 결혼한 탈북 여성에게 영주권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씨는 죽은 사람의 신분증을 위조해 중국에서 숨어 다녀야 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남편을 만나 큰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다른 탈북 여성들은 남편의 폭력과 감금에 시달리는 일이 많다고 증언했다.

대부분 불법 체류자 신분인 탈북 여성들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 겪어야 하는 심각한 인권침해다. 이 씨는 “먹고살기 어려운 부모가 나이 많은 중국인에게 어린 딸을 한국 돈 500만∼600만 원에 파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인 남편은 어린 아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집 안에 몇 년씩 가둬놓고 수공업 일을 시키기도 한다.

탈북 브로커에게 속아 인신매매로 중국인과 살게 된 사례도 많았다. 2007년 탈북해 일본 도쿄(東京)에 살고 있는 50대 여성은 “두 번째 탈북 시도 때 브로커가 젊은 여성 2명과 함께 선양(瀋陽)까지 데리고 간 뒤 중국인 남자에게 팔아넘겼다”고 말했다. 중국말도 안 통하는 데다 신분증명서도 없으면 공안에 반드시 붙잡히기 때문에 제3국으로 갈 때까지 중국 남자와 살아야 했다. 중국인 남성은 자신이 화장실에 갈 때에도 감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다가 북한으로 송환된 여성이 중국인 남성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발각되면 ‘중국 종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북한 당국이 강제 낙태를 시키기도 한다고 탈북자들은 전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한 여성들도 있다는 것.

탈북자들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개선하는 출발점은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기춘(가명·49) 씨는 “생활이 어려우니까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해 ‘죄’를 짓고 그게 인권침해의 출발점이 된다”며 “결국 생활이 개선돼야 인권침해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밖에서 인권침해를 없애라고 말해봐야 북한 고위층들은 절대 안 들어준다”고 덧붙였다.

생계 곤란은 밀수, 탈북으로 이어지고 이는 북한 정부의 감시와 처벌 강화, 인권침해라는 악순환을 심화시킨다는 게 북한 주민들 앞에 놓인 현실이다.

북-중 국경지대인 양강도 출신 서수연(가명·45·여) 씨는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전 시기에는 평범한 주부였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배급이 끊겨 쌀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그는 구리 등을 챙겨 압록강 둑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중국 상인들을 만나 비누, 신발을 받아왔다. 밀수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서 씨는 “나라만 바라보던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 때 다 굶어죽었다”며 “아무리 단속이 무서워도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고 말했다.

2014년 봄. 한반도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동아일보·아사히신문 공동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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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탈북자#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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