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12/대선 D-50]3파전-단일화 압박…10년만의 붕어빵 대선, 결과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30일 03시 00분


코멘트

■ 역대 대선과 비교해보니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1987년 이후 역대 대선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지역구도 속에 보수와 진보, 세대가 격돌하면서 대선 때마다 합종과 연횡이 되풀이됐다.

선거일을 코앞에 두고 성사된 ‘후보 단일화’가 대선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1997년과 2002년 대선이었다. 대선이 50일 앞으로 다가온 올해 대선도 ‘단일화’의 화두 속에 안갯속 승부가 이어지고 있다. 5년 전, 10년 전, 15년 전 대선을 통해 이번 대선의 결과를 가늠해볼 수 있을까.

2007년 대선은 이례적으로 대세론이 끝까지 유지됐다. 강력한 반(反)노무현 정서 속에 대선 지형은 일찌감치 야당인 한나라당 우세로 구축됐다. 대선 50일 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50% 이상을 기록하며 전례 없는 고공비행을 이어갔다. 정권심판론이 비등한 가운데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은 9월 15일에야 시작됐고 10월 15일 정동영 후보가 선출됐다. 이후 제3후보로 떠오른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와 정 후보 사이에 ‘반이명박 연대’ 논의가 대선 막판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단일화 요구는 예전과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일화가 대선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2002년과 1997년이었다. 2002년 대선 50일 전 선거 구도는 지금과 비슷한 삼파전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 월드컵 4강 진출 성과에 힘입어 급부상한 무소속 정몽준 후보의 ‘빅3’였다.

당시 정 후보는 대선을 93일 앞둔 9월 17일 출마를 선언했고 대선 50일을 앞두고 노·정 후보에 대한 단일화 압박은 거세졌다. 두 후보가 합치면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었던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정 후보는 11월 5일 국민통합21을 창당한 뒤 민주당과 본격적인 단일화 협상에 들어갔다. 단일화 방식을 놓고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여론조사를 통해 11월 25일 노 후보가 단일 후보로 결정됐다. 대선후보 등록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정 후보는 투표 전날 밤 지지를 철회했지만 12월 19일 선거 결과는 노무현 48.9%, 이회창 46.6%였다.

1997년 대선에서는 단일화 논의가 일찍부터 시작됐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김대중(DJ) 전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가 불과 79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혼자 힘으로는 안 되겠다’고 절감한 DJ는 1년 가까이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에 대한 구애를 이어갔다. JP는 오랫동안 애를 태우다 11월 13일에야 내각제 개헌을 약속한 DJ와 DJP연합에 서명했다. 지역도 이념도 다른 이질적인 결합이었지만 선거 결과는 김대중 40.2%, 이회창 38.7%로 DJP 연합의 승리였다. 물론 한나라당 중심의 보수 진영이 ‘이회창-이인제’로 분열한 결과이기도 했다.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역대 대선에서 늘 반복된 대목도 있다. 여당 후보와 현직 대통령의 관계다. 여당 후보는 인기가 떨어진 현직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늘 미묘한 긴장 관계가 형성됐다. 2002년 노무현 후보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그랬고 1997년 이회창 후보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랬다. 지금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역대 대선 비교#단일화 압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