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현안 취합→ 盧집무실서 직불금 회의→ 감사원, 비공개 결정

  • 입력 2008년 10월 20일 02시 56분


청와대 직접지시 이후 ‘직불금 감사’ 5개월 앞당겨져

결과 보고받은 이호철 靑상황실장 “엉망일줄 알았다”

감사원, 김조원 총장 등 참석 회의서 “대외비” 매듭

민감한 자료 폐기 등 정권차원 개입 없었을지 의문

■ 노무현 정부 ‘쌀 직불금 감사’ 전말

지난해 4월 감사원이 쌀 소득보전 직불금 감사에 착수한 과정에 청와대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노무현 정부의 책임론으로 불거지는 등 파문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감사 착수에서 감사결과 보고에 이르기까지 독립기관인 감사원의 업무 행태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농민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쌀 직불금 문제를 감사해 놓고서도 정작 감사결과는 비공개로 결정했다. 더욱이 비경작자이면서도 직불금을 수령한 17만3497명의 신상 자료를 감사위원회의 직후 전량 폐기한 것은 정권 차원의 개입이 없이는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 靑 ‘임기 후 문제될 사안 보고하라’

지난해 3월 청와대는 대통령경제정책비서관실 주도로 각 부처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을 대상으로 ‘문제 정책 리스트’를 만들었다. 정권이 바뀔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정책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권이 교체됐을 때 새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를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미리 대비하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듯하다.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공무원은 “부처별로 나중에 문제가 될 만한 정책들을 취합했다”면서 “제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정책들은 임기 내에 고쳐놓고 가야 나중에 공격 빌미를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와대는 당시 리스트를 바탕으로 감사원과 긴밀히 공조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작년 3월 초 감사원에 문제 소지가 될 만한 건을 모아 청와대가 감사를 요구한 것으로 안다”면서 “감사원은 향후 감사 일정과 사안의 시급성을 감안해 상반기와 하반기 감사과제로 나눠 국별로 감사를 실시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가장 ‘뜨거운 감자’는 단연 쌀 직불금 문제였다. 노무현 정부는 쌀시장 개방에 대비해 실제 경작을 하는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위해 쌀 직불금 수혜 대상을 대폭 늘려 놓았다. 주무 부처인 농림부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지만 청와대엔 문제가 많다는 정보가 들어간 것이었다.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이호철 대통령국정상황실장이 이 문제를 계속 스크린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6월 15일 이 상황실장의 지시로 감사원 관계자들이 이례적으로 청와대에 감사결과를 보고했다.

○ 6·15 보고와 6·20 대책회의

감사원의 감사결과는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정권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불금은 엉뚱한 곳으로 새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들의 분노가 불 보듯 뻔했다. 당시 감사를 했던 한 관계자는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직불금을 엉뚱하게 돈 있는 비경작자들이 타 가고 있었다”면서 “회사원과 공무원, 금융인, 공기업 임직원, 전문직 종사자 등 농사하고는 상관없는 사람 17만여 명이 직불금을 타 가고 있었다는 감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6월 15일 이 실장은 감사원 관계자들을 호출했다.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하니 감사결과를 미리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하복동 감사원 제1사무차장과 정창영 산업환경감사국장 등 감사원 직원 4명이 가서 감사결과를 보고했다. 예상치 못한 감사결과에 이 실장의 얼굴이 굳어졌고 “이럴 줄 알았다”는 탄식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실장은 노 대통령의 지방 순행 길에 이런 감사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부터 닷새 후 열린 대책회의는 대통령집무실에서 이뤄졌다. 대책회의 장소부터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터라 김조원 감사원 사무총장의 보고는 10분 만에 끝났다. 당시 정부 참석자는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 박홍수 농림부 장관이었다.

감사원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사태를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는 박홍수 농림부 장관에게 격분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박 장관의 보고에 “임기 말이라고 개기느냐”고 연거푸 3차례 같은 말로 박 장관을 질타했다는 것이다.

○ 석연치 않은 감사위원 회의 결과

이로부터 한 달 후인 7월 26일 쌀 직불금 감사결과에 대한 감사위원회의가 열렸다. 당초 감사반에서는 쌀 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사이고 제도 운영에 심각한 구멍이 뚫렸다는 점을 중시해 박해상 농림부 차관과 담당 국장 과장을 모두 불러 추궁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관심을 가진 사안인 데다 워낙 폭발력이 있는 문제여서 책임자를 처벌할 필요가 있었다”면서 “박 차관을 징계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감사위원회의에서 이 문제가 장차관의 잘못이라고 하기보다는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감사위원들의 토론 끝에 전윤철 감사원장은 “‘개인 주의(注意)’를 ‘기관 주의’로 바꾸겠다”며 박 차관에 대한 주의 조치를 농림부 기관 주의 조치로 변경했다.

그러면서 전 감사원장은 “이 문제가 워낙 민감하지 않습니까?”라고 운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이 사건 주심을 맡은 박종구 감사위원은 “이 부분은 공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고 전 감사원장은 “공표 안 할 수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박 위원은 “대외비 정도로 하자”고 제안했고 김조원 사무총장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거들었다.

이처럼 감사원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비공개 결정을 내린 데는 청와대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당시 김조원 감사원 사무총장은 청와대 근무 때 이호철 대통령국정상황실장과 자주 접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국정상황실장이 마음만 먹으면 김 사무총장이나 전윤철 감사원장을 통해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청와대와 감사원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실제로 이 국정상황실장이 이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챙긴 점, 노 대통령이 박홍수 농림부 장관을 강하게 질책 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전격 경질한 점, 김조원 사무총장이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출신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감사위원 회의의 비공개 결정이 청와대의 뜻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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