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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7월 29일 22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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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심보다는 치밀한 전략을
한국의 외교실력은 지난주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은 1994년 ARF 창설 멤버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2000년에 23번째 회원국이 된 후발주자다. ARF의 핵심 세력인 아세안만 해도 우리는 1999년 출범한 아세안+3(한국 중국 일본)의 일원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구나 한국이 제기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 해결은 문명사회가 한결같이 첫 손가락에 꼽고 있는 인도(人道)에 관한 문제다. 외교통상부는 북한의 반발쯤은 가볍게 물리치고 회원국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금강산 사건을 ARF 무대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ARF 다자(多者)외교는 한국의 예상을 벗어난 영역에서 진행됐다. 북한은 10·4선언을 들고 나와 맞불을 놓았고, 의장국인 싱가포르는 남한과 북한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뤘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이끄는 대표단은 북한의 카드를 예상하지 못해 허둥대다 모처럼 목소리를 높였던 금강산 사건이 10·4선언 암초에 걸려 의장성명에서 빠지는 불상사를 막지 못했다. 우리가 그동안 벌어놓은 외교역량이 충분했다면, 민간인을 죽이고도 공동조사에 응하지 않는 북한의 비인도적 처사를 싱가포르에 이해시킬 능력이 있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불행이다. ARF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한국은 아시아 외교무대에서도 강자(强者)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본에 말려든 독도 혼란도 한국의 위상에 대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유명환 장관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면 일본의 ‘독도 도발’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본 총리와 외상에게 자제를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과거와는 달리 직접 독도 영유권을 들고 나와 뒤통수를 때렸다. 한국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이 일본을 설득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외교 관계에서 허장성세(虛張聲勢)는 통하지 않는다. 냉혹한 국제무대에서 국가의 능력에 대한 과신은 거꾸로 국익 실현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크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야말로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맞춤용 명언이 아닐까 싶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외교 실패가 초래한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ARF를 계기로 더 꼬여버린 남북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北, 10·4선언 다그칠 자격 없다
북한의 10·4선언 공세로 우리가 궁지에 몰린 것 같은 분위기인데 과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는 10·4선언에 대해 할 말이 없는가. 남북 정상선언을 실천하라는 북의 요구에 쩔쩔매야만 하는가. 전혀 그럴 일이 아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남북관계 발전·평화번영 선언’을 다시 읽어보라. 선언 2항에는 ‘남과 북은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라는 대목이 들어있다. ‘내정 불간섭’은 남도 북도 지켜야 할 약속이다. 북한이 그동안 남한의 내정에 대해 무슨 짓을 했는지는 그들 스스로 잘 알 것이다. 남한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온갖 간섭과 악담을 쏟아내고도 뻔뻔스럽게 정상 합의 이행을 외치는 북이야말로 제 얼굴에 침을 뱉는 한심한 존재다.
10·4선언 3항에는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라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도 북은 여전히 남을 적대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한 관광객을 살해하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남북 정상의 합의를 위반한 쪽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다.
상대가 북한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한국 외교가 실패를 딛고 일어설 길은 얼마든지 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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