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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2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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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규 전 의원은 경남 지사 시절인 1999∼2002년 지역 내의 몇 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상대(1999년) 창원대(2000년) 동아대(2002년)에서 경제 행정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측근은 22일 “김 전 지사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학위를 수여한 한 대학으로부터 한의대 유치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부의 인허가 사안인 한의대 유치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2003년에도 김 지사는 부산 지역의 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경남지사를 11년째 하고 있던 그는 이를 거절했다.
이 측근은 “김 전 의원은 미국 체류시절 명예박사 학위 수여에 담긴 의미를 깊이 공감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몇 번 받았지만, 한국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에 뭔가 꼬리표가 붙은 듯한 느낌이어서 거절했다”고 회상했다. 명예박사 학위를 제의한 대학 고위 관계자로부터 “서운하다”는 반응이 뒤따랐다고 한다.
○ 실력자에게 모이는 박사학위
김 전 의원의 사례처럼 네 번째 학위나마 거절한 사례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본보가 22일 다수의 의원 보좌관들에게 문의했으나 “명예박사를 거절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29일 KAIST에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는 ‘첫 여성’이 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역시 1980년대 말 자유중국문화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다.
양지원 KAIST 부총장은 22일 통화에서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박 전 대표는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었다”며 “여성 이공계 학도의 역할모델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15일 모교인 중앙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번 행사는 지난해 가을 예정됐던 수여식이 ‘선거 이후’로 연기된 뒤 열리는 자리였다.
당시 이 대학 박범훈 총장이 이명박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 물망에 올랐다는 점에서 굳이 오해를 살 필요가 없다는 판단 때문에 연기했다고 대학 행정실 관계자는 설명했다.
박 전 대표의 측근인 김무성 한나라당 최고위원도 지난해 1월 영남의 한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최고위원이 학위를 받기 전 이 대학은 해양 생물에서 자원을 만들어 내는 정부 발주 ‘마린바이오21 프로젝트’를 따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2003년 이후 정당대표들의 명예박사 취득도 끊이지 않았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2005년 금오공대에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는 2004년 이후 강원대, 인제대, 세종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해 원광대에서 정치학 명예박사가 됐다.
○ 재원 조달, 그리고 영향력
해마다 각 대학이 수여하는 명예박사는 그 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 학교 재정 지원, 정치적 영향력 확대, 학교 간 교류 활성화 등 대학들의 복잡한 계산이 작용한 탓이다.
명예박사 학위를 준 뒤 수여자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거나 지방자치단체장에게 학위를 수여해 지역 내 학교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곳도 있다. 물론 명예박사가 정치인에게만 집중되는 건 아니다.
22일 교육인적자원부에 따르면 고등교육법은 박사학위 과정이 있는 대학원을 둔 학교에서 대학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원회의 결정은 대외관계를 다루는 대외협력처나 총장, 이사장의 입김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
2007년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 경영학이 35명, 경제학이 10명으로 이 분야가 전체의 25.7%를 차지했다. 문학은 26명, 철학과 정치학은 각각 19명이었다. 학위 수여가 정치인 이외에도 기부금 지원이 가능한 기업인과 경제인으로 다변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방 국립대의 한 관계자는 “향토기업을 만들어 동문을 많이 채용한 모교 출신 기업인 등에게 학위를 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김혁규 전 지사, 김무성 최고위원의 사례처럼 학교가 위치한 지역 정치인에게 학위가 모이는 경향도 엄존한다. 지방의 A 국립대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도지사와 3명의 관할지역 시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줬고, 또 B 국립대는 도지사와 2명의 시장에게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타 대학 총장이나 이사장에게 명예박사를 준다면 학교 간 교류가 부드러워질 수 있다. 명예박사 학위로 학술교류를 강화하는 사례는 사립대에서 많이 발견된다.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와 서강대, 한남대와 숭실대 등에서 서로 총장과 이사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해 왔다.
○ 명예박사 수여가 드문 선진국
해외 대학의 명예박사는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엄격히 선별하므로 학위를 받는 일이 매우 드물다. 독일 본 대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단 4명에게만 명예박사를 수여했다.
프랑스 대학들은 각 분야 석학으로 인정받는 외국인에게만 명예박사를 줄 수 있도록 했고, 일본도 학위보다 실력이 우선인 대학 분위기에 따라 명예박사를 수여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미국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엄격히 심사해 그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에게만 학위를 줄 수 있게 했다.
지난해 2월 독일 본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허영 전 연세대 교수는 “국내 대학이 명예박사를 남발해 학위의 권위와 수준을 스스로 실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승련 기자 srkim@donga.com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