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형 브리핑’ 4년… 국민 알권리 막는 폐쇄형 제도

  • 입력 2007년 4월 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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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의 정례 브리핑. 기자들은 “정부 브리핑 내용이 부실해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서는 담당 공무원 접촉을 통한 심층 취재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의 정례 브리핑. 기자들은 “정부 브리핑 내용이 부실해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해서는 담당 공무원 접촉을 통한 심층 취재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어이쿠! ○○일보 기자도 나오셨네요. 몰랐는데…. 밥 먹고 얼른 들어가 사후 보고를 올려야겠군요.” 최근 청와대의 한 비서관과 출입기자 몇 명이 점심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관은 사전에 거명되지 않았던 기자가 함께 나온 것을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메이저 언론사 기자를 만날 때는 사전 보고가 의무인데…” 하며 난감해했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부터 실시된 ‘개방형 브리핑 제도’에 대한 일선 취재기자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이 제도는 당초 도입 취지와 달리 ‘정책 홍보의 장’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고, 기자들은 취재원 접촉을 제한받아 심층 취재를 할 수 없는 ‘닭장 속 닭’이 됐다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국정홍보처의 해외 취재지원 실태 조사=국정홍보처는 지난달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실시한 국내외 기자실 운영 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정부 내 기자들이 상주하는 기자실이 없으며 사전협의 없는 공무원 대상 인터뷰 취재는 불허한다는 내용이었다.

박남춘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도 6일 오후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열린 ‘참여정부 4년간의 성과와 과제’라는 제목의 특강에서 “기자들의 사무실 출입을 못하게 하고 그 대신 브리핑 제도를 도입했는데, 브리핑 제도가 잘 안 되니까 언론탄압이라고 역공한다. 서구 사회는 기자실이라는 공간조차 제공하지 않는다”며 국정홍보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정종복 위원은 6일 보도 자료를 내고 “현지 해외공관에서 제출한 원본 자료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국정홍보처가 발표한 해외 취재지원 실태 조사는 정부의 입맛대로 각색됐다”고 지적했다.

정 의원은 “27개 조사 대상국 중 대통령제인 미국, 포르투갈 2개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원내각제 또는 의원내각제가 변형된 형태인 이원집정부제를 실시한다”며 “영국, 뉴질랜드는 의원내각제이기 때문에 의회에 기자실이 있고 정부 내에 기자실을 따로 두지 않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무원 개별 취재에 대해 국정홍보처는 ‘공보실 경유’라고 발표했으나 원본 자료에는 미국은 공무원 개별 접근을 전면 허용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도 공보관실과 협의 없이 인터뷰했더라도 별도의 불이익은 가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덴마크에서도 출입처에 등록된 기자는 사무실 임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정 의원은 “현재의 브리핑 및 송고실 운영 제도는 2003년 미국, 일본, 독일, 영국을 모델로 삼아 만든 것이며 당시 해외조사 예산에 2400만 원이 들었다”며 “당시와 사실상 똑같은 결과를 놓고 이번에는 기자실 폐지에 활용하려는 것은 대통령 입맛 맞추기용”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지난달 22, 23일 강원 평창군에서 열린 정부 부처 홍보관리과 워크숍에서 의견을 수렴한 뒤 부처별로 기자실 축소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워크숍에 참석한 40여 명의 각 부처 홍보관리관은 기자실 축소 폐지에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실을 없애면 기자들과 일일이 대면해 정책을 설명해야 하는데 효율적이지 않다” “재정이 열악한 마이너 언론에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줘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다” 등의 의견이 이어졌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브리핑 제도는 개방형? 폐쇄형!=청와대는 지난해 7월 ‘세금 내기 아까운 약탈정부’ 등 본보 칼럼 두 편을 문제 삼아 공개적으로 ‘취재 거부’를 선언했다. 이렇듯 개방형 브리핑 제도 시행 이후 공무원들은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식의 취재 거부가 크게 늘어났다. 외교통상부는 기자실이 있는 2층과 공무원들이 일하는 사무실 사이에 있는 문을 굳게 잠가 사무실 출입을 불가능하게 했다.

박천일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개방형 브리핑 제도가 말로만 ‘개방형’이지 실제 운영 행태를 보면 ‘폐쇄적’ ‘일방향적’ 정보 전달에 그치고 있다”며 “대통령이 기자실은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곳’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한 이 제도는 성공할 수 없고 정부와 언론 간 단절만 심화할 뿐”이라고 말했다.

문화일보 이인표 기자가 올해 초 발표한 논문 ‘개방형 브리핑제에 대한 기자 인식도 연구’에 따르면 기자 4명 중 3명은 개방형 브리핑 제도를 실패한 제도라고 평가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와 경기 과천시에 있는 8개 정부부처 브리핑룸을 출입하는 기자 97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이 제도에 대해 ‘폐지해야 한다’(26%) ‘개선이 필요하다’(50%) 등 부정적 평가가 76%에 이르렀다. 반면 ‘현행 유지’는 14.6%에 불과했고, 나머지 9.4%는 ‘관심 없다’고 답했다.

손영준 국민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정부는 보도 자료대로 써 주길 원하며 취재를 과도하게 제한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라며 “언론의 고유 임무인 ‘감시’(워치도그)와 ‘정보 제공’ 역할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브리핑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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