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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23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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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의에서 나온 노무현 대통령의 격정적 발언 배경을 놓고 뒷말이 많다.
현 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고건 전 총리를 비롯해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 것도 그렇지만, 손을 휘저으며 주먹을 쥐거나 탁자를 내리치는 등 흥분한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1년 전 민주평통이 주최했던 같은 행사에서 관용의 정신을 역설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노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준비된 발언이 아니라 참석자들의 제언에 답변하다 발언이 길어졌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22일 “노 대통령이 키워드 중심의 발언 요지를 적은 메모만 들고 연단에 올라가 대중 유세하듯이 즉석연설을 했다”며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표현을 풍부하게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연설을 하다보니 감정이 격앙돼 충동적으로 거친 표현을 쏟아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행사를 민주평통이 주최했다는 점도 노 대통령을 자극했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은 과거에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었으나 현 정부 출범 후 상대적으로 연령도 낮아지고 친여 성향으로 대폭 물갈이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있을 때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의 물갈이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이 연설 도중 “국방, 외교, 안보, 통일 이것 저한테 다 이렇게 맡겨줘라, 이렇게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 말 좀 한번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데서도 민주평통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드러난다. 실제 이날 노 대통령이 격한 발언을 하자 일부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파장까지 염두에 두고 철저히 준비해서 말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더 많다. 노 대통령은 작심하고 말을 할 때 포문을 여는 한마디를 던지는 습관이 있다. 임기 관련 내용으로 파문을 빚은 이달 초 국무회의 발언 때도 “한 마디 할까요”라고 서두를 던졌다. 이번 민주평통 발언에서는 “변명할랍니다”가 그 신호탄이었다.
노 대통령은 표현은 거칠었지만 주요 정책노선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따라서 ‘발언 요지’에 조목조목 반박할 사안들의 키워드를 써서 올라갔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노 대통령이 특히 “작전통제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느냐. 직무유기 아니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며 군 원로들에게 강한 불쾌감을 표시한 데서도 자신이 의욕을 갖고 추진 하고 있는 주요정책인 전시작전권 환수에 대한 집착이 엿보인다.
열린우리당 내 통합신당 논의를 ‘지역당’으로 비판하고 있는 평소 생각도 그대로 드러났다. 노 대통령이 우회적으로 비판한 고 전 총리와 열린우리당 김 의장, 정 전 의장은 여권 내 통합신당파의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아내가 나더러 신문 보라고 한다”고 소개했듯이, 민주평통 행사 당일 아침에 배달된 본보의 고 전 총리 인터뷰 기사가 노 대통령을 자극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현장에 있었던 민주평통 소속 인사는 “예상치 못한 대통령의 흥분한 모습을 보고 우리도 놀랐다”면서 “그러나 조목조목 나오는 얘기로 볼 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국회에 머리 조아리더라도 사법개혁안 처리되게 하라”
“저로서는 십수 년 묵은 국가적 과제를 마무리하게 돼 덩달아 기분 좋다. 좋은 성과에 한 다리 걸치고 편승할 수 있어 보람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사법개혁추진위원회 위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사법개혁관련 법안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전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쏟아냈던 원색적인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은 또 “장관들도 머리 조아리는 한이 있어도 이번 임시국회에서 (사법개혁 관련법안 처리가) 완결되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했다. 올해 7월 국무위원들에게 “장관이 소신에 찬 모습으로 답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과 대조적이다.
▽‘변화무쌍 발언’=취임 초부터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해 파란을 일으켰던 노 대통령의 ‘돌출 발언’은 최근 들어 더욱 빈발하고 있다. 더구나 그 발언들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식이어서 노 대통령의 심사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8일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만일 당적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까지 몰리면 임기 중에 당적을 포기하는 네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탈당과 대통령직 사임을 동시에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다음 날 전남 무안에서 열린 서남권종합발전구상 관련 오찬 간담회에서는 “임기가 얼마 안 남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4일 동남아 순방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떠나면서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써서 청와대브리핑에 올렸다. 이 글에서는 “한나라당의 비협조로 대통령직 수행이 아주 어렵다. 국정운영을 잘하고 싶지만 야당이 사사건건 방해하고 열린우리당 지도부도 당 해체작업에만 골몰한다”고 주변을 비판했다.
그러나 7일 호주 시드니 동포간담회에서는 “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제 정치적 역량의 부족이고 이 점이 국민에게 대단히 미안하다”며 ‘내 탓’을 자인했다가, 21일 민주평통 행사에서 다시 국정운영 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강조했다.
대통령의 발언이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이 자기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냈다.
원래 20분으로 예정됐던 21일 평통 자문회의 발언의 경우, 즉석에서 시간을 늘려 무려 1시간 10분씩이나 한 사실에서부터 노 대통령의 정서적 불안정성이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는 “자기가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이 큰 것 같다”며 “따돌림을 당한다는 서운함이 반동적이고, 정서적 컨트롤을 벗어난 행동을 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이 과거와 달리 연설을 하면서 큰 동작을 취한 것에도 주목했다. 노 대통령은 “수수방관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보였고, “미국 바짓가랑이를 잡고 엉덩이 뒤에 숨어서…”라고 할 때는 두 손으로 뭔가를 쥐는 모양을 취하며 무릎을 구부려 숨는 흉내를 냈다.
심영섭(심리학 박사) 한국영상응용연구소 대표는 “자기를 알아 달라는, 진심을 알아 달라는 간절한 호소로서 스크린 밖의 배우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이런 행동을 흔히 ‘히스테릭’이라고도 부른다”고 말했고, 하 교수는 “뭔가 전달하고픈 절박한 게 있는데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답답함과 억울함이 표현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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