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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0월 13일 20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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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 드영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보가 쓴 '군인: 콜린 파월의 일생'은 1기 부시 행정부(2001~2005년)가 편 한반도 정책의 '커튼 뒤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음은 주요내용. 괄호안 내용은 상황 설명이다.
▽백악관의 강경자세=(2차 북한 핵 위기가 터진 뒤 4개월 뒤인) 2003년 2월 당시 상원 외교위에서 의원들이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론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자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미국이 언젠가는 북한과 직접 대화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북한의 첫 접촉은 그해 4월 북중미 3국이 참가하는 3자회담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며칠 뒤 부시 대통령은 상원의원들에게 "그런 얘기는 나의 정책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백악관 참모들은 파월 당시 국무장관이 '배반의 비둘기'처럼 행동한다고 여겼다.
▽럼즈펠드 메모=2003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북한 중국 미국의 3자 회담. 파월 장관은 중국에게 "절대로 북미간 양자 회담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내부 메모를 통해 "미국의 목표는 북한 정권의 붕괴이지, 김정일 정권과의 대화가 아니다"며 반발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이어 수석대표를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서 존 볼턴 당시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파월 장관도 켈리 차관보에게 "회담 중 구석에서 북한 대표와 한 두 시간 얘기를 나누는 것은 좋지만 절대로 테이블에 마주 앉지 말라"고 지시했다.
▽부통령이 좌지우지=2004년 2월 2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이른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CVID)' 핵 폐기를 북한에 주문했다. 그러나 북한은 오히려 같은 원칙이 '미국의 북한 적대시 정책' 포기에도 적용돼야 한다며 맞섰다. 회담은 겉돌았다.
파월 장관은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뒤 "(협상이 깨지지 않도록) 외교적 표현을 써서 대응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 그러나 밤사이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입장을 '강경한 어조'로 바꿔놓았다.
지침변경 사실에 분노한 파월 장관이 이튿날 백악관을 찾아가 부시 대통령에게 대놓고 "어제 밤에 바쁘셨나요?"라고 물었다. 대통령은 "그들(체니 부통령 그룹)이 말 안하던가?"라고 되물었다. 파월 장관은 대통령에게 "체니의 지침대로 실행됐으면 6자회담은 끝장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련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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