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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12월 12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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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하이드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은 올여름 고향인 일리노이 주 출신의 정치 대선배이자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낸 M 전 의원에게서 전화를 2, 3통 받았다.
M 전 의원은 “일본을 규탄하는 종전 60주년 결의안을 꼭 하원에서 통과시켜야만 하겠느냐”고 물었다. 하이드 위원장은 “정확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했지만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하튼 결의안은 7월 하원에서 통과됐다.
M 전 의원의 ‘압박 전화’는 30년간 축적된 일본의 막강한 로비력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워싱턴에서는 대(對)의회 로비가 ‘이익 실현 창구’로 뿌리내린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불모지대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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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비로 통한다=우드로 윌슨 대통령(재임기간 1913∼1921년)은 “의사당에서 돌을 던지면 로비스트를 맞히지 않을 재간이 없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워싱턴은 로비의 도시다.
2005년 현재 의회와 법무부에 등록된 로비스트 수는 3만5000명 안팎. 5년 사이에 2배 늘어난 수치다. 잘 나가는 의회보좌관 출신은 20만∼30만 달러를 챙겨갈 정도로 연봉도 껑충 뛰었다.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 ‘로비스트’라는 직업의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로비스트 전성시대의 도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 1970년대 이후 미국 정치의 특징은 여소야대 구도라는 점. 자연히 백악관이 의회를 통과한 기업 관련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이 잦았다. 기껏 성사시킨 의회 로비가 무산되는 셈이다.
그러나 공화당이 1995년 의회를, 2001년 백악관을 장악하면서 이런 사정이 달라졌다.
요즘 의사당 내 청문회장 주변은 ‘구치 걸치(Gucci Gulch·값비싼 프랑스제 구두를 신은 로비스트들이 서성대는 통로라는 의미)’라고 불릴 만큼 로비스트로 북적댄다.
▽로비는 헌법이 부여한 기회=미국 로비 현장의 이면에는 잭 아브라모프와 같은 로비스트의 부패 행각이 공화당의 정치 기반을 뒤흔들 만큼 ‘복마전’같은 면도 있다.
그러나 로비 제도 자체는 수정헌법 1조가 보장한 권리다. 전미로비스트연맹의 래리 보리 수석부회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로비스트는 합법적 제도 안에서 명예롭게 일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헌법이 보장한 직업이라는 것이다.
주미 한국대사관이 최초의 합법적 대의회 로비에 나선 명분도 마찬가지. 워싱턴의 대형 법률회사인 애킨 검프의 파트너인 김석한(金碩漢) 변호사도 “로비를 포기하는 것은 국익을 관철할 기회의 상실을 뜻한다”며 로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 로비 외교의 현실=주미 한국대사관의 대의회 정무외교 인력은 참사관 1명, 서기관 2명. 인력도 부족하지만 워싱턴 외교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즉 로비스트들의 징검다리 역할이 필요하다.
한 중견 외교관은 “내년도 로비 예산으로 10억 원을 요청했지만 워싱턴의 현실을 생각하면 0을 한 개 더 붙여도 모자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종합 로비 시스템을 만들려면 유권자인 재미교포 조직을 통합하고,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인지도가 높은 현지 투자 기업도 활용해야 한다는 조언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현대자동차 미주법인에서 로비스트를 활용해 온 신현규(申鉉奎) 전무는 “풀뿌리 로비의 역량을 키우고, 대형 로비회사를 통한 고위급 로비와 젊은 로비스트를 통한 실무급 로비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인 구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로비스트들, 8일간 의회인사 250차례 접촉▼
파산 직전의 미국 석유회사 유노칼(UNOCAL)을 인수하려던 중국 국영석유회사(CNOOC·시누크)가 올여름 펼친 미국 의회 로비전은 워싱턴 정가를 상대로 한 로비가 얼마나 공격적인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 회사는 결국 의회의 반(反)중국 정서를 넘지 못해 인수를 포기했다.
CNOOC는 올해 6월 애킨 검프, 패튼 보그스 등 6개 대형 로비회사와 동시에 단기 계약을 했다. 미 법무부 기록에 따르면 A 로비사 소속 로비스트 13명은 6월 말 ‘단 8일 동안’ 백악관, 부통령실, 에너지부, 상무부 및 상하원 관계자들과 모두 250차례나 접촉했다. 13명에는 전직 유엔 주재 미국대사, 전직 하원의원 2명이 포함됐다.
로비스트들은 CNOOC가 얼마나 ‘서구적’으로 경영되는지를 강조했다. 로비 대상 의원 중 한 사람이 의회에 제출한 ‘동료의원 전상서(Dear Colleague Letter)’를 로비스트가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저우원중(周文重) 주미 중국대사는 로비스트의 도움으로 다수의 상·하원의원과 2차례 접촉했다. 그는 6월 30일 미중 워킹그룹 모임에서 연설을 했고, 7월 20일 몇몇 하원의원과 식사를 함께했다.
실제로 민주당 소속 M 의원은 7월 8일 A회사 사무실을 직접 방문해 30분간 중국 기업의 논리를 듣는 ‘성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한 현직 로비스트는 본보 인터뷰에서 “워싱턴 의회가 의외로 로비스트의 ‘작업’에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법무부 자료는 A회사가 설립한 외곽단체가 7월 25일 M 의원에게 1000달러를 정치자금으로 지불한 것으로 나와 있다. 중국 기업에 유리한 표결을 한 다른 동료의원 3명도 같은 날짜에 A회사로부터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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