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누가 헌법을 수호할 것인가' 全文

  • 입력 2004년 5월 16일 17시 22분


2004년 5월 14일은 역사에 기록될 날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TV 앞에 앉아 조용히 재판장의 결정문 낭독을 들었다. 어찌된 일인지 며칠 전부터 탄핵이 기각된다는 소문이 안개처럼 퍼져 기정사실화된 분위기라 결론에 대한 긴장감 보다는 기각의 논리에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심지어 탄핵소추를 밀어붙인 한나라당조차도 탄핵이 기각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럴 경우 어떻게 사과할 것인지를 놓고 토론을 하고 있다 하니 탄핵심판을 누가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재판장이 탄핵사유의 존재 여부를 심판하는 대목에서는 참으로 공감이 가고 사뭇 엄숙함을 느낀다. 헌법의 수호를 책임지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위엄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헌법 또는 법률위반이라는 탄핵사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아마 이 부분에 관하여는 재판관 사이에 이견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 사유가 대통령 직을 파면시킬 만큼 중대하지 않으므로 탄핵을 기각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재판장이 이러 저러한 법리를 들어 설명하지만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탄핵사유를 인정할 수 없다면 모르지만 탄핵사유를 인정해 놓고 결론을 기각이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헌법재판소가 헌법의 정신이 아니라 여론이나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았다고 과연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재판장은 말한다. 헌법재판관 가운데 탄핵을 받아들여 파면시키자는 수(數)가 정족수인 6인에 미치지 못하므로 탄핵을 기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탄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재판관은 몇 명이란 말인가. 5인이라면 탄핵을 반대한 재판관의 숫자보다 다수가 된다.

그런데 언론은 언제나 소수라고 말한다. 과연 소수인가. 다수이나 다만 3분의 2가 되지 않아 기각이라는 결론을 냈다는 말인가.

우리 국민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또 헌법재판관은 한사람 한사람이 헌법의 수호자이다. 마땅히 헌법의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책임을 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재판장은 묘한 논리를 앞세워 숫자도 이름도 밝히지 않겠다고 한다. 이토록 무책임한 일이 또 있겠는가.

나는 1999년 봄 미국에 있으면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Impeachment Trial) 과정을 TV 생중계를 통해 생생히 지켜본 일이 있다. 미국에서는 하원이 소추를 하고 상원이 심판을 한다. 우리 나라는 소추도 심판도 3분의 2의 찬성을 요구하지만 미국에서는 소추도 심판도 과반수로 한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소추를 할 때 토론 없이 탄핵사유를 포괄적으로 놓고 무기명비밀투표를 하지만, 미국에서는 상원, 하원 모두 토론을 하고 탄핵사유별로 공개투표를 한다. 자연히 누가 찬성하고 반대했는지 알게 된다.

상원과 하원에서 투표를 할 때 탄핵사유별로 유죄인가(guilty), 무죄인가(not guilty)를 놓고 표결한다. 모두 5가지 탄핵사유를 놓고 투표했는데 하원에서는 3가지 사유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상원에 소추되었다. 상원에서는 이 3가지 사유별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모두 2 또는 3표 차이로 무죄를 인정하는 의원이 많아 탄핵은 기각되었다. 그 순간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하였다. 그러나 탄핵을 추진한 공화당이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오늘의 탄핵심판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시비를 걸 생각도 없고, 또 걸어봐야 특별한 방도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심판이 갖는 의미를 반추하고, 우리 헌법의 미래를 걱정하는 문제는 이와는 별개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심판을 통하여 우리는 대통령이 과연 헌법의 수호자인지, 헌법재판소가 과연 용기 있게 헌법을 수호할 의지를 갖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이 다짐하게 된다. 결국 어떠한 경우에도 최후의 헌법 수호자는 헌법을 제정한 국민이라고 말이다.

나는 우리의 위대한 국민이 궁극적으로 헌법을 수호하리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일이 없다. 또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며 번영과 통일의 역사를 창조해 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4. 05. 14

이 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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