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이벤트 民生’의 빈 잔칫상

  • 입력 2004년 2월 24일 19시 14분


“지난 1년간 수백건의 민생회의, 이벤트를 만들었는데 (언론은) 갈등과 싸움만 크게 비추고 조용하지만 민생을 위한 일은 제대로 반영을 안 해줬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회견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은 뚜벅뚜벅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언론이 자꾸 뒤로 가는 모습만 비춘다는 생각에는 대통령이나 참모들이나 한가지인 모양이다. 청와대가 이 정부 출범 1주년을 계기로 며칠 전 스스로 ‘자화자찬’이라며 발표한 자료를 보면 경제·민생 살리기에 이렇게 헌신한 정부가 또 있을까 싶다. 지난해 노 대통령의 일정 1314회 가운데 36%, 지시사항 377건 중 59%가 경제·민생 분야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실적도 놀랍다. 경제·민생 정책의 단위과제 335개 중 98% 이상이 완료됐거나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 정부기관인 통계청이 지난해 도시근로자가구 소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500만 도시근로자 가구의 지난해 월평균 실질소득은 265만원으로 2002년보다 1.6% 증가하는 데 그쳤다. 외환위기 여파로 경제가 크게 뒷걸음질 친 1998년 이후 5년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이다. 하위 10% 계층의 월평균 명목소득은 78만원으로 전년보다 5만원 감소했다. 상위 20% 계층의 소득은 하위 20% 계층의 5.22배로 전년도의 5.18배에 비해 높아졌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분배를 강조한 노무현 정부에서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모두 심해졌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노 대통령이 열심히 챙긴 민생현실의 한 단면이다.

현 상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는 분배 악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첫째, 세계화 시나리오다. 지금은 1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리고 소수의 창의성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다. 이들의 창발성과 적극적인 노력을 이끌어 내려면 능력에 따른 보상이 필수적이다. 그러다 보면 상위계층의 소득이 하위계층보다 빠르게 늘어 소득격차가 커질 수 있다. 하지만 하위계층도 상위계층만큼은 아니어도 함께 소득이 증가하는 ‘윈윈 게임’이다. 불행히도 이건 우리 이야기가 아니다.

둘째, 빗나간 분배 개선 시나리오다. 상위계층을 끌어내려 소득격차를 줄이려 하면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파이’가 줄어든다. 반(反)기업 정서와 반부유층 정서가 기승을 부릴수록 투자와 소비가 위축돼 결국 경제적 약자인 실업자, 비정규직 근로자, 영세자영업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본다. 하위계층의 소득은 크게 줄어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이 모두 심화한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한 게 바로 통계청 조사결과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각종 이익집단의 내 몫 찾기를 부추긴 분열의 리더십, ‘떼법’ 앞에 무력한 정부의 모습이 이런 결과를 더욱 키웠다. 경제학자 맨커 올슨은 “특수이익집단으로 가득 찬 사회란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레슬링선수로 가득 찬 유리그릇 상점과 같다. 가져가는 것보다 깨지는 것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우리의 지난 1년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손에 잡히는 성과를 만드는 통합과 상생의 리더십이다. 성과 없는 로드맵과 말잔치는 빈 잔칫상일 뿐이다.

천광암 논설위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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