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후보 인사청문회]"어떻게 10년간 영장 안나올수 있나"

  • 입력 2003년 2월 20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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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고건 국무총리후보자가 병역면제 의혹 등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지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영수기자
20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고건 국무총리후보자가 병역면제 의혹 등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지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서영수기자
▼본인-차남 병역의혹▼

20일 시작된 고건(高建) 국무총리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은 고 후보자 본인과 차남 휘(輝)씨의 병역 기피 의혹을 집중 추궁했다.

첫 질문에 나선 한나라당 임인배(林仁培) 의원은 “1958년 최우선 입영대상인 갑종 판정을 받은 고 후보자에게 어떻게 10년 동안 영장이 안 나올 수 있느냐”며 “영장이 안 나오면 병무당국에 알아보고 자진 입대하는 게 상식 아니냐”고 말했다.

임 의원은 또 “1984년 1급 판정을 받은 차남은 대학원 재학중이던 87년 5월 어떻게 재신검 판정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5급 면제판정을 받았나. 또 중병에 걸려 면제를 받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면제 후 9개월 만에 석사학위를 받고 정보기술(IT)회사에 입사했는지 이상하다”며 “손을 쓰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니냐”고 지적했다.

같은 당 전재희(全在姬) 의원은 “60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한 고 후보자는 58년부터 병역을 연기해 최우선 입영대상이었고 특히 60년의 경우 입영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병역미필자의 입영 연기가 시작된 건 61년 6월부터다”며 “1년4개월 동안 영장이 안 나온 것은 대학총장으로 있던 부친이 부탁했기 때문 아니냐”고 따졌다.

민주당 이종걸(李鍾杰) 의원은 “고 후보자는 66년까지도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미하령(未下令) 상태였는데 62년 무리없이 공무원에 임용돼 병역기피 오해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고 후보자는 병역회피 의혹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면서도 국민의 시선을 의식한 듯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다. 그는 “병역을 필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나라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6월항쟁때 행적▼

이날 청문회에서는 고건 총리후보자의 잠적문제도 논란이 됐다. 우선 고 후보자가 1979년 10·26 직후 대통령정무2수석비서관, 80년 5·17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맡고 있었으나 사태 수습을 하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는 의혹이 쟁점이 됐다.

한나라당 이방호(李方鎬) 의원은 “10·26 직후 빈소에서 밤을 새운 장관들이 고 후보자를 보지 못했다고 하고, 당시 청와대에선 ‘고건 어디 있나’라고 법석을 떨었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에서) 국장기간 중 서울 근교 병원에 입원해 있던 고 후보자를 데리고 왔다는 제보가 입수됐다”고 추궁했다.

그러나 고 후보자는 “10·26 당시 청와대 근처에서 식사 도중 연락을 받고 제일 먼저 도착했다”며 “당시에 병원에 입원한 사실이 없고, 10·26 직후 사흘간 홍성철 당시 보건사회부장관 등이 빈소에 같이 있었다고 확인해줬다”고 반박했다. 같은 당의 이인기(李仁基) 의원은 “80년 5·17 당시 정무수석이 사표를 낸다면 비서실장에게 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고 후보자는 사표를 냈다고 하지만, 최광수(崔侊洙) 당시 비서실장 등은 사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민주당 이종걸(李鍾杰) 의원은 “당시 사직서에 ‘의원면직’이라고 돼 있다면 스스로 사퇴한 것이 맞지 않느냐”며 고 후보자를 엄호했다.

고 후보자는 “사표는 운전사를 통해 전달했다”며 “당시에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사표를 냈다면 사의를 관철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행적도 도마에 올랐다.

한나라당 원희룡(元喜龍) 의원은 “고 후보자는 당시 내무장관으로서 6·10 시위를 진압한 최고책임자였는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는 당시 부산 시위대의 선두에 있었다”며 노 당선자와 고 후보자의 시국관 차이를 꼬집었다.

이에 고 후보자는 “6월 항쟁 당시 내무장관으로서 정부의 시국관에 입각한 실정법 질서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으나, 정치적 역사적으로 보면 6월 항쟁은 민주화의 전기였다고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국회의원시절 언행▼

이날 청문회에서 의원들은 1980년대 굵직한 시국사건과 4·13 호헌조치 등과 관련한 고건 총리후보자의 12대 의원시절 언행도 문제삼았다.

한나라당 오세훈(吳世勳) 의원은 “당시 미국문화원 점거사건과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군 고문 치사사건 등 첨예한 시국사건이 빈발해 온 국민이 분노하고 절망했는데, 고 후보자는 이를 직접 다룬 국회 내무위원으로 있으면서 어떻게 이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며 고 후보자의 시국관을 문제삼았다.

오 의원은 “대형 시국사건과 관련해 내무위가 7번 열렸고 일부 의원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해 분개하고 재발방지책을 내놓기도 했는데, 당시 여당인 민정당 소속이었던 고 후보자는 끝까지 침묵만 지켰다”며 “유능한 행정관료로서 행정의 달인이란 말을 듣는 것도 좋지만 필요할 때는 자리를 걸고 ‘노(No)’라고 할 수 있는 강한 소신과 철학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고 후보자는 “당시 저는 오랫동안 중단된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었고, 시국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여야 의원들이 말씀을 많이 하니까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는지도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민주당 이호웅(李浩雄) 의원은 “고 후보자는 전두환 정권의 87년 4·13호헌조치는 현명하지 못했다고 서면답변했다”고 상기시킨 뒤 “그러나 고 후보자는 호헌조치 직후인 87년 5월 23일 민정당 전북도지부 위원장 선출 때는 ‘4·13 호헌조치는 불가피한 결단이었다. 정권을 재창출하자’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쳤다.

이에 고 후보자는 “당시 당원들을 대상으로 당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권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권력에 줄을 대 자리를 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고 해명했다.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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