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특사 방북, '악의 축' 인식 불변…성과 불투명

  • 입력 2002년 9월 29일 18시 25분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은 최근 한반도 정세 변화에서 다소 소외됐던 미국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지난달 초 7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이어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방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방북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반도의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지만 미국은 이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2000년 11월의 미사일회담을 끝으로 북한과 의미 있는 접촉을 갖지 못했던 미국으로서도 급박하게 정세가 바뀌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켈리 차관보가 평양에서 북측과 핵문제를 비롯한 안보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끌어낼 경우 한반도 정세는 한 미 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역학구도를 만들어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북-미대화 재개는 그동안 북한의 대외관계 개선 움직임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북한의 활발한 대외접촉이 경제개혁 및 개방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북-미대화는 핵문제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 문제 등 한반도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를 다루는 자리라는 점에서다. 북한이 경제개혁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으로만 대외관계 개선 태도를 보였는지, 아니면 안보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비전을 갖고 접근하는지 여부는 켈리 특사의 방북을 통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미 양측이 넘어야 할 WMD에 대한 견해차는 양측의 대화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안보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그동안의 강경기류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평가한 인식에서 변화가 없고, 미 행정부 내에서도 북한에 대한 회의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로 인해 우리 정부 일각에서는 “미국 특사 방북은 일단은 북-미대화의 끈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한반도문제의 주도권을 유지하겠다는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신의주 경제특구를 발표하는 등 예상외의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일단 북한측의 태도를 확인해보는 것도 괜찮고,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한반도 현안을 풀어가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또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한 북한의 적극적인 태도변화와 달리 WMD 문제의 해결방향이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미국이 지속적으로 북한과 대화 채널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 따라서 한반도 정세의 주요 행위자인 미국이 주도권을 되찾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지 여부는 켈리 특사의 방북시 북-미 양국이 최소한의 ‘합의’를 이끌어내야만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美 대북정책 强穩분열 여전"▼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를 다음달 3일 북한에 특사로 파견키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정책에 관해 여전히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돼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27일 보도했다.

신문은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팀은 평양이 진심으로 돌파구를 열망하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고자 하는 포용파와, 북한은 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술책을 부리면서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조기에 제거될 경우 다음 타깃이 되는 것을 모면하려는 것으로 보는 강경파로 나뉘어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음에도 뭔가 제안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처럼 보인다”며 “이라크 공격에 대한 국제 지지가 필요한 부시 대통령은 동맹인 일본과 한국이 북한을 포용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평화를 위한 기회를 박탈할 경우 아시아에서 반미감정이 불붙게 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최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과거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것에 관해서도 포용파는 ‘북한이 진정한 돌파구를 원하는 사례’로 간주하는 반면 매파는 ‘단지 일본의 원조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 보고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한편 프랑스의 르몽드는 28일 ‘미국을 우려하는 아시아의 대화’라는 제목의 1면 기사에서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행동에 대한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역내 협력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르몽드는 “서울과 도쿄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이때 동북아에 제2의 전선을 펼 시기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하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최근 방북도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선택을 배제, 지역 안정을 확립하려는 조치였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켈리, 서해직항로 이용 방북▼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다음달 3일 방북하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는 서해 직항공로를 이용해 남북을 왕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29일 “켈리 차관보는 서해 직항로를 이용해 방북한 뒤 다시 서울로 돌아올 계획”이라며 “북한과 미국은 뉴욕 채널을 통해 방북경로 등을 최종 협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켈리 차관보가 서해 직항로를 이용할 경우 지난 3월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이어 4번째로 이 항로를 통해 방북하는 외국 인사가 된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서해 직항로가 처음 열린 이후로는 7번째가 된다.

한편 미 국무부는 켈리 차관보 일행이 30일 군용기 편으로 워싱턴을 출발해 다음달 1일 도쿄, 2일 서울을 각각 방문한 뒤 3일부터 5일까지 평양에 머문 후 5일 서울로 다시 왔다가 6일 도쿄를 거쳐 워싱턴으로 귀환한다고 발표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켈리 차관보가 이끄는 방북단은 국가안보회의(NSC), 합참, 국무부, 국방부 관계자 등 9명 정도로 구성된다고 밝히고 군용기의 크기가 작아 취재단은 함께 방북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논의될 내용에 대해선 “우리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핵 활동, 재래식 병력 및 북한 주민들의 인도적 상황 등 우리의 우려에 관해 포괄적 해결을 모색하고 싶다는 뜻을 북한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최근 북한에서 약간의 긍정적인 일들이 전개되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특히 안보 분야를 포함한 많은 분야에선 거의 변화를 볼 수 없다”며 “방북 대표단은 이 모든 이슈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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