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인준-追更案 분리처리/野 「U턴」배경]

  • 입력 1998년 3월 11일 20시 11분


한나라당이 11일 추가경정예산안 분리처리 방침으로 전격 선회한 것은 조순(趙淳)총재 이한동(李漢東)대표 서청원(徐淸源)사무총장 이상득(李相得)원내총무 등 당지도부가 며칠동안의 비밀작업을 통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당의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 주말부터였다. 2일 국회에서의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을 ‘승리’로 평가하며 만족감을 드러냈던 한나라당은 엄청난 비난여론에 직면했다.

당내에서도 “추경안과 총리인준문제를 연계한 것은 실책이다. 총리문제가 장기화하면 한두달이 넘어갈 수도 있는데 그때까지도 추경안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말이냐”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여론을 청취한 당지도부는 9일 오전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당내 의견을 한번 모아보자”고 결론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경제를 망친 당이 다시 경제를 볼모로 잡는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큰 문제”라는 얘기도 나왔다.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서총장과 이총무가 주로 역할을 분담, 백방으로 뛰었다. 당고문 중진은 물론 소장파가 주로 포진한 헌정수호비상대책위원회측과도 조율했다. 이 과정에서 맹형규(孟亨奎)대변인이 9일 “추경안을 분리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백지화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당지도부는 10일 저녁 조총재가 강원지역의원모임을, 이총무가 경북지역의원모임을 가지면서 ‘추경안 분리처리’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특히 서총장은 10일 김윤환(金潤煥)고문과 단독 회동한데 이어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한 음식점에서 각 계파 중진모임을 주재하는 등 의견 결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후6시반부터 2시간가량 진행된 계파 중진모임은 수행원들까지 데려오지 않을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됐다.

참석자는 △이한동계의 김영구(金榮龜)△민주계의 신상우(辛相佑) △민정계의 이세기(李世基)의원 등이었다. 김윤환고문계의 양정규(梁正圭)의원은 선약으로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서총장과 미리 만나 ‘추경안 분리처리 수용’ 입장을 전달했다.

모임 후 서총장은 이대표와 이총무 하경근(河璟根)정책위의장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됐다. 치고 나가자”며 11일 오전 63빌딩에서의 조찬을 제의했다.

이런 물밑작업으로 11일의 공식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주요당직자회의는 분리처리를 당론으로 정했고 오후의 의원총회에서도 반론이 없었다. 특히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와 의총은 협상 전권을 총무단에 일임키로 결정, 추경안 분리처리 외에 준비된 카드가 더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박제균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