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비자금」설이 폭로된 지 1주일이 지났는데도 민심은 신한국당이 의도했던 방향으로는 흐르지 않는 것 같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회의 김대중후보의 강세에 변화가 없고 오히려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후보 지지율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비자금설 폭로가 당초 여당이 겨냥했던 목표를 벗어나고 있는 것은 민심이 여당측의 무분별한 폭로전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민심이 반감을 보이는 이유는 대충 세가지로 집약되는 것 같다. 첫째, 여권의 엄청난 정치자금은 덮어두고 여권에 비하면 「소액」에 불과한 야권의 정치자금만 들춰내는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라는 인식일 것이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지난 5월 대국민담화에서도 지적했듯이 「정치인들은 모두 과거의 잘못된 제도와 관행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데도 유독 야당에만 정치자금 내용을 공개하라고 폭로전으로 압박하는 이유를 국민들은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는 듯하다. 국민은 진상규명은 원하나 정략적이고 불공정한 강자의 논리에는 공감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여당은 야당의 정치자금을 추적하고 폭로하는데 국가기관의 협조를 얻어 증거를 수집하고 제시할 수 있지만 야당은 단편적인 제보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당과 야당의 정치자금 의혹제기 역시 불공정게임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국가기관을 정치자금의 추적에 이용하는 것은 금융실명제를 형해화(形骸化)하는 등 불법 탈법으로 정의를 세우겠다는 이율배반을 저지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민심이 등을 돌리는 세번째 이유일 것이다. 목표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는 것은 다시 지적할 필요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여당측이 강도 높게 요구하고 있는 검찰의 비자금 수사도 자칫 검찰을 정치적 불공정게임에 끌어들이려 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검찰의 수사 착수는 야당을 자극하여 여야간 무차별 폭로전을 유도할 우려가 없지 않다. 수사기간으로 봐도 검찰이 대선 전까지 의혹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기는 어렵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선은 검찰이 선거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형국으로 흐르고 여야는 공멸할 우려도 없지 않다. 누구보다도 김대통령이 이 점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여야 극한대결로 인한 정치공백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정치는 그렇다 치고 경제는 어떻게 되며 나라 형편은 또 어떻게 되겠는가. 신한국당 내부에서조차 막가는 폭로전에 대해 일부 비판론과 인책론이 제기되는 것도 이 점을 염려한 탓일 것이다. 신한국당은 이성을 되찾아 더 이상 수렁에 빠져드는 자충수를 두지 말아야 한다. 이제라도 정책으로 승부하는 대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필요하다면 김대중씨가 기자회견에서 제의한 김대통령과의 단독회담도 하나의 수습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