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9위서 공중분해… 10여년 도피… 굴곡진 삶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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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前진로그룹 회장 별세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은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로스’였다. 사업 확장이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지만 너무 높이 올라간 탓에 밀랍으로 붙인 날개가 뜨거운 태양열에 녹아버렸다.

캄보디아와 중국을 떠돌며 10년간 도피생활을 해온 ‘비운의 황태자’ 장 전 회장이 3일(현지 시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63세.

5일 주중국 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장 전 회장은 3일 오전 베이징 자택에서 심장마비 증세로 쓰러져 결국 사망했다. 유족들은 현지에서 화장 절차를 진행한 후 한국에서 장례식을 다시 한 번 치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회장은 소주 ‘참이슬’과 두꺼비 로고로 잘 알려진 주류업체 진로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인물이다. 진로는 국내 소주업계의 ‘절대 강자’였다.

국내 소주 시장은 1960년대까지 진로와 삼학이 양분하는 구도였으나 1970년대 초 삼학이 세금포탈 사건으로 몰락한 뒤부터 진로의 독주 체제가 이어졌다. 1977년엔 진로소주 빈 병에 다른 소주와 물을 섞은 가짜 진로소주를 유통시키던 조직이 적발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일부 지역의 가게에선 자기 지역 소주 3병을 사는 사람에게만 진로소주 1병을 팔 정도였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1979년 진로에 입사한 장 전 회장은 창업자인 부친 장학엽 전 회장의 뒤를 이어 1988년 제2대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그는 진로를 소주 전문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92년에는 진로쿠어스맥주를 설립해 ‘카스’를 내놓으며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고 전선 제조, 건설, 운송, 백화점, 화장품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무리한 사세 확장은 결국 진로그룹과 장 전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진로그룹은 한때 2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19위까지 올랐으나 1997년 닥친 외환위기 전후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됐다.

진로그룹은 그해 7월 프로농구단 ‘진로매카스’를 SK텔레콤에 매각하고 1999년에는 자회사 진로쿠어스맥주도 오비맥주에 매각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힘썼지만 악화된 경영 상태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진로그룹은 2003년 법정관리와 계열사 분할 매각 등을 통해 공중분해됐다. 장 전 회장은 이 과정에서 분식회계, 비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며 2004년 10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장 전 회장의 기약 없는 도피 생활이 시작된 것은 집행유예 중이던 2005년부터다. 그는 진로그룹을 되찾으려는 의지가 강했지만 보유 지분 전량이 소각되는 등 경영 복귀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장 전 회장은 캄보디아와 중국을 떠돌며 현지에서 은행, 부동산개발회사, 카지노 등을 운영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성과를 내진 못했다. 오랜 도피 생활로 지친 그는 지인들에게 잘못 알려진 점이 많다고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로 역시 장 전 회장처럼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7년에는 회사의 부도를 막기 위해 임직원들이 나서 회사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2003년 법정관리를 앞두고는 무기한 조업 중단을 선언했던 노조가 ‘참이슬’만큼은 살려야 한다며 조업에 복귀하기도 했다. 진로는 결국 2005년 하이트맥주에 인수됐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장진호#전 진로그룹 회장#별세#이카로스#심장마비#참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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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회사 살리기 1백일 작전’을 벌이던 임직원들과 함께 서울 서초구 아크리스백화점을 찾은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오른쪽). 하지만 진로그룹은 그해 9월 부도를 맞았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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