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대신 귀로… 司試를 뚫다

  • 입력 2008년 10월 22일 03시 04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사법시험 2차에 합격한 최영 씨가 21일 환한 얼굴로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사법시험 2차에 합격한 최영 씨가 21일 환한 얼굴로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시각장애인 첫 2차합격자 최영 씨

2005년 시력 잃고 화면낭독프로그램으로 공부

“시력을 잃고 나서도 시험 준비하느라 변변한 재활교육을 못 받았어요. 아직 혼자서는 밥 먹으러 외출도 못하는데,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걸음마부터 배워야겠어요.”

사법시험이 시행된 지 61년 만에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2차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최영(27·서울대 법대 졸업) 씨.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원의 2평 남짓한 방에서 합격의 기쁨을 누린 그는 “주변에서 도와준 이도 많고 운이 좋았다”며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최 씨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된 1998년 봄,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자 병원을 찾았다가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야는 차츰 좁아졌고, 야맹 증세도 생겼다. 좋아하는 산책을 못하게 된 것은 물론 사람이나 장애물을 보지 못해 부딪히거나 넘어지는 일도 잦아졌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시력은 더욱 나빠졌고, 이 때문에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법시험 준비도 여의치 않았다.

2005년 초 최 씨의 시력은 오른쪽 눈은 아예 볼 수 없고 왼쪽 눈은 시력이 0.2∼0.3 정도로 책을 가까이 들여다봐도 한 글자를 겨우 읽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돼 시험 준비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 1년 동안의 방황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최 씨는 동기생보다 늦어진 졸업을 준비하다 한 시각장애인 친구에게서 컴퓨터 화면의 글자를 읽어주는 ‘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소개받았다. 점자를 배우지 못한 최 씨에게 책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최 씨는 시험 준비를 다시 하기로 마음먹고 2006년 1월 시각장애인이 ‘화면 낭독 프로그램’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법무부에 요청했다. 최 씨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그로부터 3년 만에 2차 시험의 관문을 넘어섰다.

경남 양산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는 아버지가 매달 부쳐주는 50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생활하며 종일 공부만 했다는 최 씨는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어느 복지재단에서 법학 서적을 텍스트 파일로 만들어 주었지만, 궁금한 점이 있을 때마다 원하는 책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너무나 답답했다.

최 씨는 “출판사들이 저작권을 침해당할까 봐 텍스트 파일 제공을 꺼리는데, 시각장애인의 읽을 권리 보장 차원에서 개선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 씨는 “판검사보다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는 시각장애인 변호사가 250명 정도 된다던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볼 생각”이라며 “국가정책 자문 업무나 시민단체 활동에도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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