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밖 명작, 인생도 ‘중경삼림’처럼[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3일 23시 09분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혼자 있고 싶었고, 밥을 잘 먹고 싶었다. 어느 퇴근길, 부적을 몸에 지니는 행위처럼 홍콩행 티켓을 끊었다. 평일엔 정신없이 일하고, 주말엔 정신없이 육아하다 출국 전날 밤에야 여행을 실감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공들인 것은 나만의 ‘홍콩 영화 위크’를 갖는 일이었다. 이른 퇴근길, ‘첨밀밀’ 재개봉을 보고, 아기를 재우고 맥주 한 캔에 ‘천장지구’를 봤다. 비행기에서는 ‘중경삼림’을 다시 봤다. 배경이 된 날짜가 여행 일정과 겹치는 4월 29일인 것에서 왠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

이심(eSIM)은 먹통에 현금도 없고 여러모로 ‘우당탕탕’이었지만, 내공이라면 내공인지 괜찮았다. 어떻게든 해결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아니라, 뭐가 됐든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한 데서 오는 여유였다. ‘중경삼림’의 촬영지였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하자 영화 속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심포니 오브 라이트’. 12년 만에 다시 본 레이저쇼는 더 이상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대신 큰 정보 없이 찾아간 식당에서 인생 최고의 베이징덕을 만났다.

이튿날은 늦잠을 잤다. 출근도 육아도 없으니 여기에서만큼은 일단 나를 좀 재우기로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마카오로 향했다가 바글거리는 인파를 피해 도망치듯 복귀했다. 저녁을 먹으러 헤매던 중, 마치 홍콩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은 야장이 불쑥 나타났다. 볶음면 하나, 맥주 한잔이 그 어떤 만찬보다 황홀했다.

다음 날은 무작정 트램에 올랐다. 목적지 없이 남은 정거장 수에 조급해하지 않고 원 없이 풍경을 누렸다. 귀국일 아침 마지막 식사를 하러 차와 간단한 음식을 주는 차찬텡에 갔다. 주문 실수로 3인분은 될 듯한 양이 나왔고, 이를 지켜보던 노부인이 나서서 주문을 확인해 주면서 통성명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기에 이르렀다. 대화 말미에는 번호를 주고받으며 나의 다음 홍콩 여행을 기약했다.

짧은 여행이었다. 쇼핑도, 대단한 관광도 없었고, 이렇다 할 맛집도 찾아간 적 없었다. 그저 여행 내내 ‘중경삼림’ OST인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만 지겹도록 들었다. 문득 영화의 탄생 비화가 떠올랐다.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당시 무협 대작인 ‘동사서독’을 찍고 있었는데 촬영이 지연되면서 뜨는 시간이 생겼다. 이때 기분 전환 겸 거리에 나가 23일 만에 가볍게 찍은 것이 바로 이 영화였다. 대본조차 준비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자유로운 연출은 빛을 발했고, ‘중경삼림’은 희대의 명작으로 남았다. 재밌는 것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동사서독’은 흥행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늘 그랬듯,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다만 여행에서 피어난 감상 속에 한 줄을 덧대어 본다. 나는 어떻게든 또 길을 찾을 것이라고. 잘못 든 길에서 뜻밖의 야장을 만나듯, 주문 실수로 멋진 인연을 만나듯, 가볍게 찍은 영화가 명작이 되듯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이 때로는 더 근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게 어떤 길이든 분명 멋진 여행이 될 것이다. 뭐가 됐든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돌아가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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