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유통망에 갇힌 학술 논문과 국가 지식 인프라[기고/정은경]

  • 동아일보

정은경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정은경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국민의 세금으로 생산된 학술 논문이 상업출판사와 상업유통망에 종속돼 높은 구독료 장벽에 갇혀 있는 구조는 공공지식의 활용을 심각하게 제약한다.

학술 논문의 출판과 유통 방식은 국내외 학술지에 따라 다르다. 국내 학술지의 경우 저자는 논문의 저작권을 학회에 양도하고, 학회는 이를 유통회사에 제공한다. 학회는 유통회사로부터 저작권료를 받아 대체로 학술지 출판 비용 등을 충당한다.

해외 학술지 논문 출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하나는 저자가 출판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대신에 저작권을 출판사로 넘기는 방식이다. 논문의 저작권이 유통회사나 출판사에 양도되면 대학과 연구기관은 학술 논문을 이용하기 위해 다시 고가의 구독료를 부담해야 한다. 다른 방식은 오픈 액세스 논문 출판이다. 저자는 논문 출판 비용(Article Processing Charge·APC)을 부담하는 대신에 저작권을 유지하고, 논문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하게 밝히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라이선스(CCL) 아래 공개된다.

그러나 해외 학술지의 APC는 편당 수백만 원에 달한다. 이 역시 대학과 연구기관의 재정, 국가 연구비, 전자저널 컨소시엄 등 공적 재원에 크게 의존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재원을 투입한 주체는 오픈 액세스 논문 출판의 체계적 지원, 출판 이후 논문의 수집·관리·통합적 활용에 대한 전략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해당 논문은 여전히 상업출판사 중심의 플랫폼과 패키지 유통 구조에 머물러 있다.

공공 재원으로 생산된 논문이 상업적 유통 구조에 종속돼 상당한 구독료 부담을 초래하거나, 오픈 액세스 논문조차 체계적인 공적 활용 전략 없이 방치되는 주된 이유는 국가 차원의 오픈 액세스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학술 논문은 반드시 오픈 액세스로 출판되도록 의무화하는 정책 수립이 시급하다. 유럽은 연구기금기관 연합체가 오픈 액세스 정책을 수립해 의무화하고, 미국 역시 대통령 교서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국가 지식 인프라 체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는 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국가 오픈 액세스 체계에서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지식 인프라 핵심 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픈 액세스 코리아(Open Access Korea·OAK) 사업을 기반으로 학술 논문과 단행본 등 지식 자산의 수집·보존·유통·활용을 아우르는 전 주기적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더불어 단순히 학술 논문의 접근과 이용 수준을 넘어, 재사용·변경·상업적 활용 가능 여부까지 명확히 제시하는 학술지 저작권 안내 시스템(KJCI)을 통해 저작권과 라이선스 정보 인프라를 통합 구축해야 한다.

학술 논문이 오픈 액세스로 개방되고 공유되면 국민은 구독료 없이 학술 정보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산업 분야에서 최신 연구 성과를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공지능(AI) 시대에 국가 경쟁력과 국민의 지식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학술 논문의 오픈 액세스 출판과 관리 체계는 필수적이다. 오픈 액세스 학술 논문을 통해 한국형 지식의 소버린 AI를 구축하고, 이를 누구나 검증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공공지식 인프라로 확립해야 한다. 이제 국가 오픈 액세스 정책 수립과 지식 인프라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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