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곳곳에 새겨지는 ‘트럼프 이름표’
케네디센터 명칭 변경에 시민 분노… “美 문화 상징에 일종의 테러”
‘독립 개선문’ 건립 추진에는… “워싱턴 경관 훼손” 우려
도로-전함에도 ‘트럼프’ 명칭… “공공 영역 중립성 훼손” 지적
미국 수도 워싱턴의 국립 문화예술기관 ‘도널드 J 트럼프와 존 F 케네디 공연예술기념센터’. 원래 이름은 ‘케네디센터’였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말 자신의 이름을 추가했다. 워싱턴=신진우 특파원 niceshin@donga.com
신진우 워싱턴 특파원《8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유명 공연장인 ‘케네디센터’ 앞. 영하 10도의 쌀쌀한 날씨를 뚫고 한 여성이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손가락 욕을 하는 포즈를 취하며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자신을 75세 “애국자”라고 소개한 미첼(가명) 씨는 “도저히 참지 못해 뭐라도 하고 싶어서 3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미첼 씨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도널드 J 트럼프와 존 F 케네디 공연예술기념센터’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외벽. 이 건물은 몇 달 전만 해도 ‘케네디센터’였지만, 그 글씨 바로 위에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빽빽하게 채워지면서 ‘트럼프 케네디센터’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됐다. 미첼 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미국 문화의 상징인 이곳에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느냐”며 “이건 문화적 테러”라고 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30대 젊은 부부는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동조한다는 듯 비슷한 포즈를 취했다.》
케네디센터는 연극·음악·무용 등 공연이 펼쳐지는 국립 문화예술기관으로, 미 대통령이 주최하는 문화 행사도 자주 열리는 곳이다. 1971년 개관 이래 클래식·오페라·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미국의 문화적 자부심을 상징해 온 이곳은 지난해 졸지에 ‘트럼프’란 이름을 추가로 얻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케네디센터 이사진을 측근들로 물갈이하고 자신은 이사장으로 취임한 게 계기가 됐다. 이후 지난해 말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기관명을 ‘트럼프 케네디센터’로 바꿨다. 자연스럽게 외벽엔 트럼프란 이름이 붙었다. 이 결정을 두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놀랍고 영광스럽다”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부터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욕구를 여러 차례 드러내 왔다. 이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는 이 같은 시도 역시 어느 정도 예견됐다. 다만 재집권 이후 노골적으로 추진되는 그의 ‘족적 남기기’ 행보에 이젠 도를 넘었단 평가가 나온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고위 관료를 지낸 한 인사는 최근 기자와 만나 “난 북한에 가보진 않았다”면서도 “요즘 트럼프를 보면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자신의 이름을 곳곳에 수놓은 독재자에 빗댄 것이다.
● “가장 크고 웅장하게”… 개선문에 집약된 야심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인접한 회전교차로 ‘메모리얼 서클’의 전경. 트럼프 대통령은 이곳에 ‘독립 개선문’을 짓겠다고 밝혔다. 멀리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링컨기념관이 보인다. 워싱턴=신진우 특파원 niceshin@donga.com트럼프 대통령의 ‘보여주기식’ 행보를 둘러싼 논란에 다시 불을 지핀 건 최근 그가 발표한 ‘독립 개선문(Independence Arch)’ 건립 계획이다. 올해 미국 독립 250주년을 기념해 세계 최고 높이인 250피트(76.2m) 규모로 세워질 이 개선문을 두고, 단순한 기념물을 넘어 정치적 족적을 각인시키려는 그의 야심이 집약된 결정체란 말까지 나온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1일 트루스소셜에 워싱턴 개선문 가상 조감도도 게시했는데, 이는 지난해 9월 미국의 건축설계기업 ‘해리슨디자인’이 공개했던 시안이다. 이 이미지를 보란 듯 내세워 개선문 건립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셈이다.
개선문의 구체적인 형상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높이’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철학만큼은 확고해 보인다. 그는 개선문 높이와 관련해 “미국은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라며 “나는 그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되길 원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 개선문은 워싱턴의 명물인 링컨기념관과 버지니아주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사이 회전교차로 ‘메모리얼 서클’ 쪽에 세워질 것으로 보인다. 계획대로 ‘76.2m’의 높이로 건설되면 파리 개선문(50m)은 물론이고 현재 아치형 기념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멕시코시티 혁명기념탑(67m)의 기록도 훌쩍 뛰어넘는다. 워싱턴 기념비(169.1m)보단 낮지만, 백악관(약 21m)이나 링컨기념관(30.4m) 등 인근의 주요 기념물보단 훨씬 높고 웅장하게 지어질 전망이다.
이 계획이 알려지면서 비판도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이 개선문이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링컨기념관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리는 등 주변 기념물들의 경관을 훼손할 거란 우려를 제기한다. 지나치게 큰 이 개선문이 다른 기념물들을 ‘인형의 집’처럼 왜소해 보이게 만들 거란 지적도 나온다. 또 개선문이 들어설 부지가 차량 통행량이 많은 곳이라 방문객들의 접근성이 떨어져 비효율적이란 비판도 적지 않다.
● 장소·분야 가리지 않는 ‘이름 붙이기’
미국 수도 워싱턴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평화연구소’. 원래 이름은 미국 평화연구소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말 자신의 이름을 추가했다.
워싱턴=신진우 특파원 niceshin@donga.com트럼프 대통령의 ‘족적 남기기’는 장소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미 의회 산하 싱크탱크 ‘미국 평화연구소’는 이미 ‘도널드 트럼프 미국 평화연구소’가 됐다.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 플로리다주 팜비치 소재 도로의 이름도 ‘도널드 J 트럼프 불러바드’로 바꿨고, 미 해군이 만들기로 한 신형 전함은 ‘트럼프급 전함’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허드슨강 터널 공사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해 주는 대가로 워싱턴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과 뉴욕시 철도역 펜스테이션 명칭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달라고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뉴욕)에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도 예외가 될 순 없다. 100만 달러(약 14억7000만 원)를 내면 미국 영주권을 신속하게 발급해 주는 ‘트럼프 골드카드’는 이미 접수 중이고, 신생아를 대상으로 1000달러를 예치하는 금융 투자 정책 ‘트럼프 계좌’도 발표됐다. 이달 운영을 시작한 미 정부의 의약품 판매 웹사이트 이름은 ‘트럼프Rx’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과도한 ‘자기 과시’ 욕구로 해석된다. 앞서 MSNBC 방송은 “트럼프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를 과시하고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부동산 개발자이자 사업가 출신인 그가 앞서 호텔, 골프장, 빌딩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가치를 높여 온 방식을 정치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했다고 분석한다.
족적을 선명하게 남기려는 건, 자기 과시 욕구를 넘어 고도의 정치적 전략일 수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국가의 상징적 유산이나 정책에 붙여 ‘트럼프 시대’의 업적을 공고히 하겠단 포석일 수 있다는 것. 또 다가올 11월 중간선거는 물론 퇴임 이후에도 지지층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정치적 브랜딩’에 나선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 “공공 가치의 사유화”… ‘포퓰리즘 통치’ 비판 커져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대표되는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침체된 미국의 기상을 되살리는 ‘강력한 국격’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운다.
반면 이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많다. 비판의 핵심은 ‘국가 자산의 사유화’다. 통상 지도자의 이름이 공적 자산이나 정책 등에 활용되는 건, 그가 퇴임한 이후에나 이뤄졌다.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인 만큼, 그 지위를 활용해 공공의 가치를 개인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가 기관이나 공공 정책은 특정 정파나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이에 대통령이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는 시도 자체가 공공 영역의 중립성을 해치는 행위란 비판도 제기된다. 야당인 민주당의 셸던 화이트하우스 상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센터를 자신의 친구들과 정치적 동맹을 위한 사교 클럽으로 장악하려고 한다”고 꼬집었다.
개선문 건설이나 ‘이름 붙이기’ 시도 등이 ‘보여주기식 성과’에만 집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복잡한 국정 현안을 단순한 마케팅 논리로 치환해 유권자의 눈을 가리는 일종의 ‘포퓰리즘적 통치’라는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