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한 해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영건의 행복 견문록]

  • 동아일보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다. 병오년은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내 밝힌다’는 불(丙)과 ‘멈춤 없는 전환’을 뜻하는 말(午)을 담고 있는 해다. 한국 사회는 탁월한 경제적 성취를 이뤘지만 초저출산, 초고령화, 초고경쟁의 사회 구조와 불안정한 노동과 주거, 정신건강의 악화, 공동체의식의 위기 등으로 이미 적색등이 켜진 지 오래다. 이런 점에서 병오년의 간지(干支)는 때마침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노력과 보상 간 연결이 취약한 동시에 경쟁을 강조하면서도 실패 후 재도전의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점은 심각한 구조적 문제다. 이와 관련해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우리가 현재의 고통을 그저 부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대안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 희망에서는 하루를 버티고, 다음 하루를 살아내며, 또다시 하루를 이어 붙이는 일이 중요하다. 거창한 목표보다는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하루하루의 실천적 삶으로 증명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때때로 사회는 개인에게 희망을 간직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희망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특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의해 육성될 수 있는 자원이다. 또 개인의 책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마땅히 제공해야 할 조건이다. 희망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외로운 불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길을 밝히는 연대와 공감의 불빛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연합(EU)은 이미 오래전부터 희망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제공하는 공공 자원의 문제’로 간주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에서는 “내 삶이 앞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정도”가 정책의 중요한 성과 지표가 된다.

하지만 국회입법조사처의 ‘2025년 대한민국 불평등 보고서’는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서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약화됐음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서 흔히 ‘개천용 지표’로 불리는 ‘상향이동성 지수’는 2006년 13.4%에서 2022년 10.5%로 감소했다. 이는 한국에서 희망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도, 개인을 탓하지 않는 정신건강 정책, 사회적 연대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기 위해 보다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바츨라프 하벨 체코 전 대통령은 “희망은 어떤 일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그 일이 의미 있다는 확신”이라고 했다. 희망이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나무를 심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그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를 심도록 해준다. 이처럼 희망은 결과가 보장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치 있는 일에 계속 도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

튀르키예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시를 남겼다.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라고 노래했다. 우리에게도 최고의 한 해는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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