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벗어나 현실로 걸어나온 AI… ‘제조 강국’ 한국에 주는 기회[맹성현의 AI시대 생존 가이드]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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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피지컬 AI’ 시대
가상공간 속 AI 물리적 세계로 나와… 공장은 이미 로봇, 자율체제로 운영
인간은 점차 위험-반복노동 벗어나… 반도체 등 제조기술 축적한 한국은
피지컬 AI 확산에 유리한 조건 갖춰… 美 클라우드AI 의존 벗어날 돌파구
맹성현 태재대 부총장·KAIST 명예교수《오전 7시. 감독이 공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명이 켜진다. 안은 고요하지만 모든 것이 생명처럼 움직인다. 천장 가까이 매달린 레일 위로 로봇 운반기가 유연하게 움직이고, 바닥에서는 자율 로봇들이 부품이 담긴 상자를 서로 주고받는다. 감독이 손목의 단말기를 켜자 화면에는 공장 전체의 움직임이 하나의 지도로 펼쳐진다. 어떤 로봇이 어느 라인을 지원하고, 어느 부품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즉시 파악된다.》
품질 검사는 고속 인공지능(AI)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한다. 작업 속도가 잠시 느려지자 제어 시스템이 즉시 생산 흐름을 수정한다. 대기하던 로봇팔이 추가 작업을 분담해 제품의 흐름은 다시 매끄럽게 이어진다. 밖에서는 자율주행 배송 차량이 완성된 제품을 싣고 출발하고, 건물 외벽의 드론이 태양광 패널을 점검한다. 공장 사무실에서는 휴머노이드 비서가 회의실 탁자에 커피와 생수를 준비하고 화면 스크린을 켠다.
이 장면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봇과 대형 AI 모델의 융합, 그리고 하드웨어 효율의 발전은 ‘피지컬 AI’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5년 안에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피지컬 AI가 본격 도입될 것으로 전망한다. 한때 수십 년은 걸릴 것으로 여겨졌던 휴머노이드 로봇이 몇 년 안에 산업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셈이다. 대규모언어모델(LLM)과 강화학습의 결합, 로봇 제조 비용의 급락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피지컬 AI란 무엇인가? 가상공간에 갇혀 있던 AI가 물리적 세계로 나와 각종 장치와 연결돼 직접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생성형 AI가 가상환경에서 움직이며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 등을 만들어내는 데 치우쳤다면 피지컬 AI는 로봇, 자율주행차, 스마트 공장의 형태로 실제 물리 환경에서 움직이며 작업한다. 즉, ‘지각-인지-행동’의 순환이 물리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예컨대 아마존은 10년 만에 100만 대 이상의 로봇을 물류 현장에 배치했다. 여타 제조, 물류, 요식업 등 산업 전반이 빠르게 자동화되고 있으며 인간은 점차 위험한 반복 노동이나 단순 노동에서 벗어나게 된다. 더 이상 시시콜콜한 일에 시간과 몸을 쓰지 않는다.
이 변화 속에서 한국에는 특별한 기회가 있다. 우리는 ‘제조 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기술을 축적해 왔다. 피지컬 AI는 바로 이 제조 현장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울 기술이다. 실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등은 AI 기반 스마트 팩토리 구축에 적극 투자하고 있으며 정부도 데이터 센터와 로봇 인프라 확충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하드웨어 역량, 제조 현장의 풍부한 데이터, 정부의 AI 인프라 투자가 결합되면 한국은 피지컬 AI의 ‘테스트베드’이자 수출 강국이 될 수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이 지능을 새로운 수출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피지컬 AI가 미국 중심의 ‘클라우드 AI’에 대한 의존 구조를 벗어날 돌파구라는 점이다. 공장, 자율주행차, 로봇처럼 ms(밀리초·1ms는 1000분의 1초) 단위의 판단이 필요한 환경에서는 현장 배치형 ‘에지(Edge) 컴퓨팅’이 필수다. 디지털 환경에서 클라우드 AI가 전체를 조율할 순 있지만 즉각적인 판단과 실행은 현장 AI가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클라우드 AI’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 솔루션을 개발할 토대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기업은 AI 도구 도입을 넘어 생산, 경영 등 전체 프로세스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에 따르면 AI를 사용하는 기업의 88%가 AI를 도입했지만 실질적 성과를 거둔 기업은 6%에 불과했다. 성공 기업들은 고객 접점부터 생산, 배송, 사후 관리까지 AI를 깊이 통합했다. 개인과 기업은 AI를 두려워하기보다 ‘오케스트레이터(orchestrator)’로서 AI를 지휘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정부는 인프라 구축과 함께 데이터 주권 확보, 안전 기준 마련, 노동 전환 교육에 나서야 한다.
새로운 AI 기술의 개발도 필요하다. 로봇과 차량, 공장 설비 안에서 돌아가는 ‘현장형 AI’가 제한된 전력과 계산 자원 안에서도 빠르게 판단·행동할 수 있도록 더 가볍고 효율적인 AI 모델과 이를 뒷받침할 전용 반도체·소프트웨어가 함께 개발돼야 한다. 다시 말해 물리 공간을 이해하고 스스로 대응하는 AI를 만들려면 기존 모델을 단순히 축소하는 수준을 넘어 에지 환경에 최적화된 새로운 구조와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장기적인 기술 투자를 해야 한다.
피지컬 AI 시대가 코앞에 와 있다. 한국은 제조 노하우, 첨단 반도체 기술, 빠른 네트워크, 민첩한 기업 문화로 이 변화를 주도할 조건을 갖췄다. 이제 필요한 것은 AI를 새로운 동료로 받아들이고 인간과 기계가 공(共)진화하는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적 상상력이다. 피지컬 AI의 미래는 우리가 사는 물리적 공간, 즉 공장, 도로, 건물, 집 등에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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