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사랑의 온도탑이 나눔온도 79.7도를 가리키고 있다.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희망2026나눔캠페인’의 올해 목표 모금액은 4500억원으로 1%가 쌓일 때마다 온도탑 온도가 1도씩 올라가며 내년 1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해마다 이맘때면 전국의 주민센터와 구호단체에서는 행복한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세밑 가난한 이웃을 위해 쌀자루와 라면 상자, 돈봉투를 몰래 놓고 가는 ‘얼굴 없는 천사’들과 이들의 신원을 확인해 고마움을 전하려는 직원들 간 실랑이다. 센터와 단체 주변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물품을 배달한 업체에 수소문을 해보아도 천사의 얼굴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누군지 알려지면 다신 안 온다”는 천사들도 있다. 올해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독지가들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이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이달 10일까지 걷힌 올해 기부금 1914억 원 가운데 익명의 기부금은 367억 원으로 19.2%로 집계됐다. 지난해(129억 원)의 2.8배이며 최근 5년 이래 최고 비중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의 1억 원 이상 고액 후원자 중 익명의 후원자도 최근 5년간 586명으로 15%에 이른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역시 최근 5년간 31명이 총 14억 원 넘는 기부금을 이름 없이 맡겨 왔다고 밝혔다. 올 3월 경북 산불, 7월 ‘괴물 폭우’로 인한 전국 각지의 산사태 등 대형 재난이 이어지자 “뉴스 보다가 마음이 쓰여서”라며 익명의 성금이 답지했다고 한다.
얼굴 없는 기부 천사는 폐지 줍는 가장부터 억대 기부금을 보내는 독지가까지 다양하다. 경남 창원시에는 국화 한 송이와 성금을 몰래 놓고 사라지는 남성이 있다. 9년간 기부한 액수가 7억4600만 원이다. 충남 논산시 ‘키다리 아저씨’는 25년간 아내의 고향 논산 지역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12억 원이 넘는 성금을 기탁했다. 경남 거창군에선 아버지 세대가 시작한 기부를 아들 세대가 이어받아 20년 넘게 쌀 포대와 라면 상자를 트럭에 싣고 오는 ‘7인의 천사들’이 유명하다. 제주 서귀포시에는 27년째 쌀을 보내오는 ‘노고록 아저씨’가 있다. 노고록은 제주 방언으로 ‘넉넉하다’는 뜻이다. 쌀을 전달받은 이들은 “명절이나 연말이면 외로운 마음보다 노고록한 마음이 앞선다”며 고마워한다.
기부 천사들이 선행을 숨기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부자 개인보다 수혜 대상이나 어려운 상황이 부각되기를 배려하는 마음에서라고 분석한다. 특히 대형 재난이나 경제 위기가 닥칠수록 ‘나보다 더 어려운 남’을 도우려는 연대 의식이 강해진다. 올해도 힘들었는데 내년엔 “더 어렵다”는 전망이다. 그래도 연말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은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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