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열린 경주 가치 다보-석가탑에 담겨
1300여 년간 서로를 빛내주며 조화 이뤄
다름을 공격의 근거로 삼는 국제-국내 현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공존의 길’ 가능해져
김도연 객원논설위원·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지난달 경주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키고 국격(國格)을 높이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모든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번 행사는 경주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세계에 더욱 깊이 알리는 소중한 기회가 된 것으로 믿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한 화려한 신라 금관으로 경주가 ‘황금의 도시’였음이 특히 부각됐지만, 사실 고도(古都) 경주의 가치는 황금보다 훨씬 더 소중한 우리의 정신과 문화 속에 있다.
불국사에 서 있는 두 석탑(石塔), 다보탑과 석가탑은 빼어난 예술적 조형물이며 동시에 큰 가르침을 주는 철학 그 자체다. 동쪽의 다보탑은 화려하고 역동적이다. 복잡한 구조 속에 세밀한 장식들이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며 보는 이로 하여금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반면 서쪽의 석가탑은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다. 장식 없이 간결한 선과 면의 조합만으로 고요하고 안정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렇게 완연히 다른 두 탑은 한 공간 안에서 서로를 빛내주며 전체적 균형을 완성하고 있다. 즉,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에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조화임을 일깨워준다. ‘같지 않아도 조화를 이룬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그 자체다.
오늘의 세계 정세는 이와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특히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상호 적대적 대응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4일(현지 시간) 전화 통화를 하는 등 자국 경제 여건을 고려해 갈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양국 경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겪었던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그리고 6·25전쟁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녔지만, 모두 주변 강대국들의 충돌과 개입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전란으로 이 땅의 민초들은 처절한 고통을 겪었고 수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이러한 역사는 열강의 갈등에서 튀어 오른 불꽃이 또다시 한반도에서 큰불로 번질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마땅히 우리가 철저하게 대비해야 할 일이다.
조화를 이루되 동일함을 강요하지 않는 화이부동의 지혜는 인류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핵심이지만, 현실 속의 강대국들은 서로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며 대립을 선택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하고 상대를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두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만약 경주 APEC 기간 중 세계의 지도자들이 다보탑과 석가탑을 함께 바라보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훨씬 다급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화이부동의 가치를 깨닫는 일이다. 한 뿌리의 같은 민족인 남북 간의 치열한 갈등도 이미 8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절실한 것은 우리 사회 그 자체다. 대한민국 정치에서는 다름이 존중의 근거가 아니라 오로지 대립의 이유가 됐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의견은 공격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마치 다보탑이 석가탑을 부정하고, 석가탑이 다보탑을 무시하며 각자 혼자만 서 있겠다고 싸우는 꼴이다.
2024년 여소야대 구도의 국회가 장관급 고위직을 30여 차례나 탄핵 소추한 일은 상대를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막장 정치였고, 그 ‘끝판왕’은 우리 정치사에 매우 큰 상처를 남긴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였다. 이로 인해 그 대통령은 탄핵 후 구속돼 있고, 민주적 선거로 여당과 야당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대법원장까지 몰아내려는 것은 삼권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민주정치가 아니다. 야당을 ‘내란 정당’이라며 해산시키겠다는 것은 공화(共和)가 아니다. 우리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들이다.
이제는 살벌한 막장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상식과 합리의 편에 서야 한다. 국민이 깨어 있으면 정치인들도 결국 극단이 아닌 조화를 선택할 것이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1300여 년 동안 말없이 서 있다. 그 침묵이 전하는 화이부동의 메시지는 우리가 다시 깊게 새겨야 할 지고(至高)의 가치다. 대한민국이 갈등과 분열을 넘어 조화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길, 그 시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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