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아파트 ‘입주민끼리’ 결혼정보회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8일 23시 18분


최근 평당 1억 원을 돌파한 서울 송파구 대단지 아파트 헬리오시티 상가에 독특한 매장이 생겼다. 분홍색 장식의 유리 너머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세요”란 문구가 보이는 결혼정보회사다.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주민이 알음알음 미혼의 입주민들을 중매해 주다가 수요가 늘자 아예 아파트 이름을 따 회사를 차렸다. 개업 3개월 만에 회원이 200명을 넘겼고, 그중 3분의 2가 입주민이라고 한다.

▷단지 내 결혼정보회사가 더 먼저 생긴 곳은 서울 서초구 래미안원베일리다. 평당 2억 원을 오르내리는 초고가 아파트에 사는 회원들이지만 거기서 또 직업, 학력 등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연회비도 50만∼1100만 원까지 제각각이다. 서울 강남구 타워팰리스에도 입주민 중매 모임이 최근 생겼다. 이들은 강남권의 다른 고가주택 주민들에게도 문호를 열고 있어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근처 주민센터로 찾아와 연결해 달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비슷한 배경의 사람들끼리 결혼하려는 풍조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마담 뚜’나 VIP 고객을 상대하는 은행원들이 부유층 자녀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아파트가 맞선의 무대가 된 건 강남 집값 폭등과 맞물린 기현상이다. 고가 아파트 커뮤니티가 몇 년 새 확 늘어난 데다, 아파트가 개인의 자산 규모를 드러내는 표식이 되면서 ‘평당 얼마짜리 아파트 소유자끼리 사돈 맺자’는 식의 생각이 싹트게 된 것이다.

▷부모가 원한다고 혼인이 성사되는 건 아니지만 자녀들도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만 고수하기엔 현실이 척박해졌다. 과거처럼 결혼해서 성실히 돈 모으면 내 집 마련이 가능했던 주거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젊은 세대에서 재력이 검증된 상대와 안전한 결혼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가 곧 신분 증명서가 돼 결혼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부자들의 혼맥 네트워크는 공고해지게 된다. 이미 심각한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의 자산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신혼부부가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선호하듯 중년 부부들이 ‘결품아’(결혼정보회사를 품은 아파트)에 몰리는 시대가 오지 말란 법도 없다. 가뜩이나 퍼진 물신주의가 더 큰 사회적 위화감으로 번질 수 있다.

▷주소지가 ‘결혼 스펙’이 되는 사회에선 비혼과 저출산도 더 가속화된다. 안 그래도 불안한 경제력 탓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데 소수의 아파트 울타리 안에서만 부가 대물림되면 담장 밖 사람들은 선택지가 좁아진다. 부자들이 결혼으로 더 연결될 때 ‘결포자’(결혼포기자)들은 발밑이 흔들릴 수 있다.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집값 폭등을 막지 못하면 아파트 입주민 결혼정보회사 같은 씁쓸한 풍경들을 자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서울 송파구#헬리오시티#결혼정보회사#고가 아파트#혼맥 네트워크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