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에게서 “한국의 민주당이 정말 중도 보수냐”는 질문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우리는 진보가 아니다”며 중도 보수를 자처하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논란이 이어지던 시점이었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한국 야당의 이념 성향 변화까지 이런 속도로 업데이트하고 있었던가. 이 관계자는 이 대표의 발언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기보다 민주당 노선이 실제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美에 도표 그려가며 ‘중도 보수’ 역설
민주당 의원들은 요즘 자신들이 접촉하는 미국 측 인사들에게 자신들이 중도 보수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접촉한 지난달 한 면담 자리에서는 한국 진보 정당의 뿌리가 원래는 보수였다는 점을 강변하며 아예 도표를 그려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모두 워싱턴의 상부로 보고됐을 것이다.
미국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당국자들이 주 52시간이나 상법 개정안 같은 한국의 경제, 민생까지 관심을 가져서 그랬을 리 없다. 조기 대선이 치러지고 정권이 교체됐을 경우 한국의 대미, 대중 정책 같은 외교안보 방향이 어디를 향할지 가늠하려 했을 것이다. 탄핵 정국 이후의 여러 시나리오를 미국 또한 들여다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민주당이 미국 측에 ‘중도 보수’ 노선을 역설한 것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노선을 미국이 껄끄럽게 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중국,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중시했던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와 툭하면 삐거덕거렸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하노이 정상회담이 틀어진 이후 비핵화 문제는 물론이고 종전선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중국 견제 등 주요 현안마다 충돌했다. 고위 당국자가 대놓고 ‘죽창가’를 외치는 문 정부의 대일 기조 또한 한미일 협력을 외쳐온 미국과 어긋났다. 미국 당국자들이 한국을 향해 “보조를 맞춰야 한다(in lockstep)”는 표현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게 이때다. 보조가 안 맞는다는 미국의 불편함이 역설적으로 더 드러났다.
백악관과 국무부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어떤 정권이냐는 상관없다. 이념은 달라도 각자의 국익에 따라 외교를 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국과 다른 외교노선을 타는 동맹국 정부를 향해 보이지 않게, 때로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강대국의 실력행사를 주저하지 않는 게 미국이다.
민주당이 지난해 4월 총선 이후 물갈이가 된 만큼 노선 변화가 적잖다는 분석도 있다. “반미나 반일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은 이제 안 나오지 않느냐”는 내부 항변도 들었다. 그러나 중도 보수를 외치면서 주요 정책마다 좌클릭하며 돌아가는 이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를 보면 외교안보 분야라고 다를지 의문이다. 586 운동권 인사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진 원로 전문가들도 건재하다.
외교안보만큼은 오락가락 행보 안 돼
국내 현안을 놓고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행보는 피곤할지언정 안에서 감내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상대국이 있는 외교안보는 다르다. 말이 바뀌고 불신이 쌓이는 만큼 국가적 손해가 커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전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해 “속았다”고 생각했고, 그 인식이 향후 한국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노선을 물었던 미국 당국자가 대화를 끝내면서 했던 말은 “트럼프 대통령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한마디였다. 민주당이 집권하든 야당으로 남든 피해 갈 수 없는 경고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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