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장원재]전원일치 판결로 사회를 바꿔야 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13일 23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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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치로 내려진 워터게이트-브라운 판결
설득·타협 거친 전원일치 판결이 갈등·분열 줄여

장원재 사회부장
장원재 사회부장
1974년 7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스캔들 관련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판결했다. 닉슨 대통령은 소식을 들은 뒤 먼저 “전원일치냐”고 물었다. 보좌관이 “그렇다”고 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17일 후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특종 주역인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미 연방대법원에 대해 쓴 ‘지혜의 아홉 기둥’에서 당시 판결 과정을 다뤘다. 그때 연방대법원에는 워런 버거 대법원장을 포함해 닉슨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4명 있었다. 하지만 설득과 합의, 절충 끝에 모두가 동의한 판결문이 나왔다. 우드워드 기자는 “(닉슨은) 반대의견 하나는 있을 걸로 믿었다”고 썼다.

버거 대법원장의 전임자는 얼 워런 전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병상에서 후배 대법관에게 워터게이트 선고를 물었고 “전원일치로 닉슨이 패소했다”는 말을 듣고 안도한 후 당일 세상을 떠났다.

워런 전 대법원장은 1954년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란 ‘브라운 판결’로 1960년대 민권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남부가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첨예하게 나뉜 대법관들의 의견을 조율해 전원일치 판결을 이끌었다.

워터게이트 판결과 브라운 판결은 최고 법원에서 내려진 전원일치 판결의 무게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대법원에서 통상적인 재판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小部)가 담당한다. 소부에서 합의가 안 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만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된 전원합의체(전합)가 맡는다. 전합 재판장은 대법원장이다.

전합 판결은 높은 법적 권위를 갖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대법원장 공백 사태에서 전합 개최 가능 여부가 논란이 된 것도 그 막중한 무게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동아일보가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재임 6년간 나온 전합 판결을 전수조사한 결과 전원일치 판결은 14.7%에 불과했다. 이용훈 사법부(36.8%), 양승태 사법부(33.6%)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물론 대법관 간 의견은 얼마든 다를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도 필요하다. 일본처럼 최고재판소 결정 대부분이 전원일치인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대법원이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법적인 최종 해결을 담당한다는 걸 감안하면 설득과 토론, 타협으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참고로 미 연방대법원의 1946∼2009년 판결 중 전원일치 비중은 30%가량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과거엔 대법관들이 토론과 설득 과정에서 처음 가졌던 입장을 변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입장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대법관들이 양극화됐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7 대 6처럼 패소한 쪽이 승복하기 쉽지 않은 판결이 되풀이되고 있다. 2019년 11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방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가 정당한지 심의할 때도 막판에 김 전 대법원장이 진보 성향 대법관들의 손을 들어 7 대 6 판결이 나왔다. 사회적·역사적으로 중요한 판결일수록 전원일치로 결정해야 갈등과 분열의 여지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민일영 전 대법관은 퇴임 후 학술대회에서 미국 사례를 들며 “대법관들이 정치적 진영에 따라 자동판매기 같은 5 대 4 판결을 되풀이하면 사회 분쟁과 이념 갈등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다음 대법원장이 누가 되든 전합을 운영할 때 새겨야 할 지적일 것이다.


장원재 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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