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INSIGHT]CEO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노동자에 대한 포용성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2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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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서 택산함괘는 연못을 뜻하는 태괘가 위에 놓이고 산을 뜻하는 간괘가 아래에 놓이는 모양의 복합 괘로 연못과 산이 서로를 품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연못은 땅(여성)의 성기이고, 산은 하늘(남성)의 성기로 택산함괘는 남녀가 서로를 껴안고 교합하는 에로틱한 장면을 묘사한다. 하지만 택산함괘를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보면 주역의 효사에 엄지발가락과 장딴지가 쓰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좀 더 확장적인 시각에서 주역을 해석하면 택산함괘가 기업 경영의 보편적인 원리와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택산함괘의 효사에 등장하는 신체 부위들은 삶의 기초인 ‘노동력’을 상징한다. 주역이 태동한 시기인 수렵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은 인간의 육체였다. 그중에서도 엄지발가락이나 장딴지, 넓적다리는 특히 없어서는 안 되는 육체노동의 근간이었다. 이들이 시원찮으면 날쌘 짐승을 추적할 수 없고 먹잇감을 구할 수도 없으며 가족이라는 기업을 원활하게 경영할 수 없다. 혀도 마찬가지다. 이 감각기관이 고장 나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열매가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

이처럼 택산함괘에는 공동체를 유지,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토대가 인간의 노동이며 노동으로 가족을 잘 부양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생산 수단을 다 동원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효사에 등장하는 여러 생산 수단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이 엄지발가락이다. 엄지발가락이 고장 나면 뛰는 것은 고사하고 걷는 것도 힘들다. 노동 자체가 힘들어진다. 집으로 말하면 주춧돌에 해당하는 것이 엄지발가락이다. 택산함괘의 효사는 ‘함기무(咸其拇)’로 시작한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꽉 주라는 뜻이다. 그것이 노동의 기초이고 생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는 오직 신발 하나만 생각했다. 스스로를 ‘슈독(Shoe Dog)’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만든 건 나이키의 신발이 아니라 ‘아식스’의 신발이었다. 필 나이트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아식스의 전신인 ‘타이거’의 신발을 수입해 미국에 판매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일본에서 수입한 아식스 신발을 신고 손에는 아식스 신발을 들고 직접 고객을 찾아다녔다. 한 켤레라도 더 팔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엄지발가락에 잔뜩 힘을 준 채 미국 곳곳을 누볐다. 그런 열정으로 미국 내 아식스 판매망을 넓혀나갔고 마침내 나이키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개발해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던 이순신은 석방된 후 백의종군한다. 수군통제사에 복귀하기 전 이순신은 남해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엄지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발바닥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남해안 각 지역의 지형적 특성과 파도의 움직임, 주기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 후 다시 조선 해군의 군권을 쥔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해군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 엄지발가락의 힘이 일군 승리였다.

기업 경영에서 보면 상품 판매의 최전방에서 뛰는 영업사원들이 택산함괘에서 말하는 노동의 기초인 엄지발가락이다. 택배 노동자, 건설 노동자, 시장 상인들, 배에서 그물을 당기는 선원들,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수확물을 거둬들이는 농민들도 모두 엄지발가락이다. 산업이 아무리 고도화돼도 이들의 수고가 없으면 공동체가 존립을 유지할 수 없다. 주역의 택산함괘는 이 땅의 수많은 영업사원, 노동자, 농민, 상인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위로의 메시지다. 주역은 말한다. “당신들이 최고입니다. 자긍심을 가지십시오.”

엄지발가락 창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나이키에 1990년대 위기가 닥쳤다. 파키스탄의 열두 살 소년이 1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루 일당을 받고 온종일 축구공을 꿰매는 모습이 보도되면서 아동 인권 침해, 노동력 착취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던 나이키는 연일 주가가 폭락하자 대책을 내놓았다. 나이키는 지속가능한 경영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근로 여건과 인권 개선에 적극 나섰고 실추됐던 기업의 이미지를 회복했다. 이처럼 택산함괘는 기업과 공동체를 지속 가능한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CEO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노동자에 대한 포용성이라는 교훈을 준다.

이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374호(2023년 8월 1일자)에 실린 ‘택산함괘는 노동에 대한 위로 메시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정리=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


#택산함괘#노동력#포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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