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어제 일 같은 계엄 관련 ‘사실확인서’ 사건[손효주 기자의 국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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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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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이른바 ‘계엄령 문건’과 관련한 자신의 발언 논란에 대한 질의를 받고 있는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진 이 문건을 국기 문란 사건이라고 했다. 동아일보DB
2018년 7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이른바 ‘계엄령 문건’과 관련한 자신의 발언 논란에 대한 질의를 받고 있는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진 이 문건을 국기 문란 사건이라고 했다. 동아일보DB
손효주 기자
손효주 기자
“나는 항명한 적이 없다. 5년이 지났지만 항명이 아니라는 내 생각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민병삼 전 100기무부대장(예비역 육군 대령)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15일 통화에서 “군 형법상 항명은 상관의 정당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라며 “당시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했던 명령은 정당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어 “내가 한 것이 항명이었다면 육군교도소에 갔겠지만 (나는) 정상 전역했다”며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라고도 했다.

민 전 부대장은 박근혜 정부 때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가 만든 ‘계엄령 검토 문건’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된 2018년 7월,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섰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이 문건을 촛불 시민을 무력진압하려는 계획으로 인식했다. 문 대통령은 헌정 중단을 노린 국기 문란 사건이라며 합동수사단 구성까지 지시했다. 이런 가운데 민 대령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공개적으로 “송 장관이 ‘법조계 문의 결과 (그 문건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송 장관은 바로 반박했다.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국방부 당국자들이 참석하는 간담회에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날 “36년째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의 명예를 걸고 답한다”는 민 대령과 “대장까지 마친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송 장관이 벌인 공개석상 진실 공방은 군 역사상 초유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에 앞서 한 언론에서 송 장관이 해당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송 장관은 “그런 적 없다”는 내용을 담은 사실관계확인서를 만들어 당시 간담회 참석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이때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한 이가 민 대령이었다. 이런 기무사와 송 장관 측 갈등은 국회에서 ‘공개 폭발’했고, 일각에선 군이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계엄령 검토 문건 폭로 사태와 그 2라운드 격인 송 장관 발언 등을 둘러싼 진실 공방은 다른 이슈들에 밀려 조금씩 잊혀졌다. 그해 9월 송 장관이 경질되고 사건에 관여한 이들이 하나둘 퇴장하면서는 지나간 일이 됐다.

그러나 최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송 전 장관을 피의자로 입건하면서 이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송 전 장관에게 적용된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허위 서명을 사실상 강요한 혐의다. 당시 계엄령 검토 문건을 사실상 내란 음모 문건으로 규정한 문재인 정부와 정반대되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 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서명을 강요한 것으로 공수처는 보고 있다.

당시 서명한 A 씨는 통화에서 “서명을 안 하는 건 자유지만 불이익은 책임 못 지겠다고 하는데 누가 서명하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했다. 또 “계엄령 문건 사건이 내 업무가 아니어서 송 장관 발언을 당시 귀담아듣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냥 서명한 것”이라는 증언들도 나왔다. 송 전 장관과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이들이 뒤늦게 당시 하지 못한 말을 이제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민 대령은 “만시지탄일 따름”이라면서도 “누군가에겐 다 지난 일이겠지만 내겐 어제 일어난 일 같다. 항명 프레임에 묶여 억울했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항명이 아니라 장관의 부하 된 도리로 양심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직언했던 것”이라며 “(이 사실관계확인서는) 향후 장관님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말도 당시 했었다”고 떠올렸다.

직권남용죄의 공소시효는 7년. 세월이 조금만 더 흘렀다면 시효가 지날 뻔한 혐의였지만 이제 공수처는 자체 인지 수사로 송 전 장관을 정조준하고 있다.

송 전 장관은 12일 당시 상황이 담긴 증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휴대전화를 압수당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내사 단계에서 상당한 진술과 증거를 확보해 혐의 입증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송 전 장관에 대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진 모른다. 다만 일각에선 ‘친위 쿠데타 계획’으로까지 규정된 당시 문건을 두고 군 당국이 연 2회 이상 연습하는 합동참모본부의 기존 계엄시행계획을 재편집한 수준이란 말도 나온다. 하필 이를 ‘군홧발’의 업보를 짊어지고 있는 만큼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기무사(옛 보안사)가 만든 탓에 오해를 눈덩이처럼 키웠다는 얘기다. 이 문건이 2017년 만들어진 ‘모종의 거사’ 계획으로 보기엔 허술하다는 점을 당시 송 장관이 누구보다 잘 알았을 텐데 장관직을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민 대령을 두고 어쩌면 5년 뒤를 내다보고 그를 살리려 했던 가장 충직한 부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이유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사실확인서#모종의 거사#국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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