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안고 들어간 명문학교, 만학도가 돼 눈칫밥 신세로

  • 동아일보

[한시를 영화로 읊다] 〈126〉 지난날을 기억하며

한시에서 ‘기억’은 단순한 회상을 넘어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성찰하는 문학적 기제로 작동한다. 조선시대 윤기(尹愭·1741∼1826)가 50대가 되어 성균관 유생 시절을 추억한 다음 시도 그 한 예다.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성균관 유생이 된 시인은 대과에 급제하지 못한 채 이십여 년간 성균관에 출입했다. 시는 성균관을 떠나야 할 형편이 된 시인이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던 지난날을 추억하고 있다. 시인이 과거 응시 자격인 원점(圓點)을 채우기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어야 했던 성균관 식당은 거친 밥술이나마 넘기며 한미한 지식인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했던 공간이었다.

영화 ‘바튼 아카데미’에서 허넘은 오랜 세월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며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영화 ‘바튼 아카데미’에서 허넘은 오랜 세월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며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소외한 자의 고독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특별한 학교 식당의 이미지를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바튼 아카데미’(2023년)에서도 마주치게 된다. 영화에선 1970년 겨울 모두가 떠난 명문 기숙학교에 ‘남겨진 사람들(원제 The Holdovers)’의 이야기가 학교 식당을 매개로 펼쳐진다.

주인공 허넘은 이 학교를 졸업한 비정규직 원로 교사로 지적 오만과 괴팍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집에 갈 수 없는 학생을 감독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는데, 아버지가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문제 학생 앵거스,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아들을 잃은 주방장 메리와 연휴를 함께 지내며 서로의 깊은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시와 영화 속 학교 식당은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의 결핍이 모이는 공간인 동시에 그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장소’가 된다. 다만 그 위로와 치유의 방식은 달랐다. 윤기가 책 속 성현(聖賢)들이 감내하던 궁핍을 마주하며 마음을 다잡았다면, 영화 속 허넘은 내면의 숨겨진 상처를 공유하는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 쌓아둔 세상을 향한 마음의 장벽을 허문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잠시의 위로는 될지언정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허넘이 오래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 스스로 멀리하던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처럼, 시인 역시 구차한 부귀를 좇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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