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겪으니 어려움에 단련돼”… 전쟁 중 창업하는 우크라 청년들[글로벌 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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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피란민 청년들(위쪽 사진). 이들은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해 8월 23일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고향 베르댠스크를 알리고 추억하는 카페를 열었다. 키이우 외곽 비타치우에서 베이커리를 개업한 이리나 소브코 씨는 12일(현지 시간) 기자에게 “이곳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연대의 공간이 됐다”고 소개했다. 키이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피란민 청년들(위쪽 사진). 이들은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해 8월 23일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고향 베르댠스크를 알리고 추억하는 카페를 열었다. 키이우 외곽 비타치우에서 베이커리를 개업한 이리나 소브코 씨는 12일(현지 시간) 기자에게 “이곳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연대의 공간이 됐다”고 소개했다. 키이우·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조은아 파리 특파원
조은아 파리 특파원
“우린 강하고, 두렵지 않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14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도심 카페에서 만난 청년 이반 카라울라노우 씨(34)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카페를 창업하게 된 이유에 대해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카페 정문에는 큼직한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 있었다.

기자가 방문한 그의 카페 이름은 ‘카락테르니키’. 우크라이나어로 ‘특징’이란 의미다. 다른 카페와 차별화된 특징을 담자는 의지가 반영됐다. 이 카페의 특이한 점은 지금은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베르댠스크를 주제로 했다는 것이다. 베르댠스크는 이 카페 직원 20여 명이 떠나온 고향이다. 카페 곳곳에 베르댠스크의 풍경을 찍은 사진과 전통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들은 베르댠스크를 상징하는 깃발로 디자인한 설탕 과자, 전통주, 전통 음식을 팔고 있었다.》






피란민들, 고향 테마로 카페 열어
카라울라노우 씨는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뒤 비교적 안전한 키이우로 옮겨왔지만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같은 고향 출신 지인들을 만나 ‘그리운 고향을 알리고 추억하는 카페를 만들자’며 의기투합하게 됐다. 애초엔 고향에서의 경험을 살려 ‘튀르키예식 후카(물담배) 바’를 운영할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을 가급적 많이 고용할 수 있는 카페가 더 낫다고 판단이 섰다.

지난해 8월 23일은 ‘우크라이나 국기의 날’이자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날 ‘러시아의 핵 공격이 있을 수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카라울라노우 씨는 “러시아의 핵 공격 예고는 우리가 카페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신호 같았다”며 “카페 개업을 한창 준비 중이었는데 이날 전격 개업했다”고 했다.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될수록 오히려 가게 문을 열어 항전 의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직원들도 개업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키이우에서 만난 지인들에게 카페 창업 취지를 설명하며 투자를 받았다. 손재주가 좋은 카라울라노우 씨는 테이블과 의자를 직접 만들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직접 가게를 수리했다. 카페에 걸어놓을 그림을 가져오고 인테리어 소품을 구해 오는 직원들도 있었다.

카페 곳곳에는 러시아에 대한 항전 의지를 새겨 넣었다. 카페 2층 벽 전면에는 대형 창 두 개가 ‘X’ 모양으로 걸려 있었다. 이 문자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X’는 우크라이나어 문자 가운데 15세기부터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오는 문자”라고 설명했다.

“이 창은 우리 고향 베르댠스크가 있는 자포리자주의 호르티차섬에서 가져왔어요. 우리 민족의 영웅인 ‘코자크’가 호르티차섬에서 외세에 맞서 쓰던 무기죠. 그 시대의 정신을 가져오고 싶었어요.”

우크라이나 전사 집단인 코자크(카자크)는 15, 16세기 러시아 등 외세에 맞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영웅 집단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코자크에게서 항전 의지와 민족정신을 찾는다. 우크라이나 국가 말미에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코자크의 국가임을 보여줄 것이다’라는 표현이 담길 정도다.

“망하면 돈 잃지 목숨 잃진 않아”
카라울라노우 씨는 오히려 전쟁을 겪으면서 더 단단해졌다고 했다. 전쟁 전에 장사할 때는 애로사항이라면 파이프 파열, 단수 등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어려움의 차원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제 우린 식자재를 사러 갈 때 공습경보가 울릴지, 식자재 도매점이 단전이나 격전 지역은 아닌지 따져보고 목숨을 걸고 갑니다. 이제 금융위기 같은 것도 두렵지 않아요. 장사해서 망하면 돈을 잃지, 목숨을 잃진 않잖아요?”

그는 전쟁 후 우크라이나 경제가 더 단단해져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우크라이나인의 기상도 세계에 널리 알려져 투자자나 소비자들이 더 주목할 것이라고 봤다.

우크라이나의 젊은 청년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도 확 달라졌다고 했다. 삶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느껴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집중하게 됐다는 얘기다. “전쟁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다 보니 우리는 종(種)이 달라졌어요. 이젠 돈을 생각하며 내키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요.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려 합니다.”

“창업 공간이자 연대의 공간”
12일 키이우에서 남쪽으로 승용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비타치우의 한 베이커리 겸 식당에는 점심시간이 지난 시각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 사장인 이리나 소브코 씨는 손님으로 북적이는 베이커리에서 음식을 나르는 틈틈이 손님들과 얼싸안고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손님 대부분이 이웃이나 친구 같았다. 카페 중앙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 있고, ‘조국을 위해 싸우는 군인에게 빵을 보내자’란 취지의 기부금 이벤트가 마련돼 있었다.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비타치우의 한 카페에 걸린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의 그림. 아이들이 보는 전쟁의 참상과 평화에 대한 기원 등이 엿보인다. 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12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비타치우의 한 카페에 걸린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의 그림. 아이들이 보는 전쟁의 참상과 평화에 대한 기원 등이 엿보인다. 비타치우=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테이블 곳곳에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크레용과 종이가 놓여 있었다. 베이커리 한편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그린 우크라이나의 풍경, 전쟁 모습 등이 걸려 있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틀 뒤인 지난해 2월 26일, 그는 베이커리 개업 일정을 앞당겨 이곳에 문을 열었다. 침공으로 갑자기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진 주민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던 베이커리 주방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각자 밀가루, 설탕, 계란 등 식재료를 주섬주섬 들고 와 함께 밀가루 반죽을 만들고 빵을 구워냈다.

이렇게 베이커리는 동네에서 연대의 상징이 됐다. 입소문이 나면서 다른 지역 손님들도 찾아오고 있다. 소브코 씨는 “우린 가진 게 별로 없었지만 함께 빵을 구우며 희망을 봤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GDP)은 전년에 비해 30.4% 줄고 실업률은 30%까지 치솟았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하지만 청년들은 지금이 암울한 만큼 오히려 미래를 더 낙관하고 있다. 전후 우크라이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며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기회를 선점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키이우시 교통 담당 부서에서 일하다가 ‘주차 공유 서비스’ 창업을 준비 중인 세르게이 마이젤 씨는 5년 뒤쯤이면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찾아 도심 주차 수요가 늘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는 “자체적으로 조사해 보니 사람들이 주차 장소를 찾는 데 쓰는 시간이 평균 15분이었다.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지 않도록 주차 공유 애플리케이션을 내놓을 계획”이라며 “4개월 뒤에는 사업을 런던 파리 뉴욕 등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서비스를 ‘우버택시’에 버금가는 ‘우버파킹’ 격으로 키운다는 포부를 나타냈다.

청년들은 기자에게 전쟁이 끝나면 꼭 다시 우크라이나를 찾아올 것을 권했다. 이곳저곳에서 사업 기회가 생기고 관광객은 늘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꼭 취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키이우·비타치우(우크라이나)에서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카페 창업#우크라 청년#연대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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