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같은 토끼, 부활의 토끼, 비싼 토끼[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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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바꾼 세마리 토끼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2년 그린 수채화 ‘야생 토끼’. 토끼의 털 한 올 한 올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려낸 이 그림은 자연을 
관찰하고 표현하길 좋아했던 뒤러의 대표작 중 하나다. 뒤러는 평생 이 작품을 간직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2년 그린 수채화 ‘야생 토끼’. 토끼의 털 한 올 한 올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려낸 이 그림은 자연을 관찰하고 표현하길 좋아했던 뒤러의 대표작 중 하나다. 뒤러는 평생 이 작품을 간직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김민 문화부 기자
김민 문화부 기자
‘흰 토끼를 따라가시오(Follow the white rabbit).’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를 진실의 세계로 이끈 이 대사를 기억하시나요?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앨리스는 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가면서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마주하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토끼가 영리한 듯 멍청하고, 온순한 듯 사나운 알쏭달쏭한 캐릭터이자,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가이드를 상징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 속에서는 어땠을까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토끼를 꼽으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다음 세 작품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끈기가 만든 사실적인 토끼
첫 번째 작품은 ‘북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렸던 독일 작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채화 ‘야생 토끼’(1502년)입니다. 언스트 핸스 곰브리치의 책 ‘서양 미술사’에서도 이 작품이 언급되는데요. 곰브리치는 “눈에 보이는 세상을 끈기와 인내로 충실하게 표현해 내고자 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카메라로 모든 순간을 쉽게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그려낸 그림의 감동이 500년 전보다는 덜합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 살아있는 토끼의 털, 흰 배경에 극적으로 드리워진 그림자, 입을 금방이라도 오물거릴 것 같은 생동감이 돋보입니다.

뒤러 ‘야생 토끼’의 눈.
뒤러 ‘야생 토끼’의 눈.
가장 놀라운 부분은 바로 토끼의 눈이죠. 확대해서 보면 토끼의 작은 눈동자에 비친 흰 두 줄이 보이는데요. 미술사학자들은 이것이 뒤러의 작업실에 있었던 창문의 잔상이라고 추측합니다. 뒤러가 얼마나 현실을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죠.

첫 번째 토끼는 인간의 손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실성의 극치까지 이르려는 ‘장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체제 한계 보여준 토끼
독일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의 1965년 퍼포먼스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사진 출처 위키아트
독일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의 1965년 퍼포먼스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사진 출처 위키아트
다음은 요제프 보이스가 1965년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입니다. 보이스는 예술을 삶의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다양한 후대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어 ‘20세기의 다빈치’로 불렸습니다.

이 퍼포먼스 작품에서 보이스는 자신의 머리를 꿀과 금박으로 덮은 다음 죽은 토끼를 끌어안고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설명했습니다. 토끼의 귀에 대고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는 그의 모습을 관객들은 갤러리 창문으로 구경했다고 합니다. 이 퍼포먼스는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나에게 토끼는 부활의 상징입니다. ‘부활’이란 건 그런데 인간의 상상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또 꿀은 인간의 사고를 말합니다. 벌이 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인간은 사고하고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죠. 이러한 인간의 능력이 죽은 것을 살게 만들지만, 또 살아있는 것을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저는 보이스의 이 말을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이어진 냉전의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즉,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만들고 사회와 시스템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이 도그마가 되면서 토끼와 자연처럼 살아있는 것들을 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죠.
어마하게 비싼 토끼
여기서 토끼는 ‘오래된 체제의 한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한 치의 흠도 없이 매끄럽고, 반짝이며, 아주 비싼 것.

냉전 체제가 무너진 이후 자본주의는 세계의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며 무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대가 낳은 예술 속 토끼의 모습은 ‘사실적인 토끼’도, ‘현명한 토끼’도 아닌 ‘어마어마하게 비싼 토끼’입니다. 세 번째 토끼는 바로 제프 쿤스의 조각 작품 ‘토끼’(1986년)입니다.

이 작품은 2019년 소더비 경매에서 1000억 원 넘는 가격에 낙찰되며 잠시나마 ‘(경매로 팔린 작품 중)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세 번째 토끼는 예술가의 붓 터치, 예술가의 사상 따위는 필요 없는, ‘비싸기로 유명한’ 것이 가장 주목받는 시대의 상징이 되었죠.

물론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값비싼 것을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흥미로운 구석도 많습니다. 우선은 끈기와 집념으로 그림을 그린 뒤러와 달리 쿤스는 자신의 조각 작품을 전문 생산 공장에 맡기기로 유명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쓰이는 오스카 트로피를 제작하는 업체에 의뢰한다고 하죠.

또 사회와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사유한 보이스와 달리 쿤스는 지금 돈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영민하게 간파해 냅니다. 그가 미술관 연간 회원권의 영업 직원으로 엄청난 실적을 낸 뒤 스스로 작품을 만들며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 알고 계시죠?

쿤스의 비싼 토끼를 보며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나?’ 약간은 절망적인 고민에 빠져들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소셜미디어 속 반짝이는 환상들에 매료된다는 것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예술 속 어떤 토끼가 가장 매력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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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토끼#사실적 토끼#부활의 상징#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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