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련 칼럼]귀에 대고 달콤한 소리만 하는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24일 23시 21분


붕괴 美 제조업, 무너진 근로윤리 한몫
포퓰리스트 대통령 “이민자, 中이 문제”
6·3 선거서도 ‘불편한 진실’엔 입 닫아
이런 정치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게 문제

김승련 논설실장
김승련 논설실장
십수 년 전 미국에선 보스턴에서 태어난 C 학점 학생과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A 학점 학생 가운데 어느 쪽의 삶이 더 나은지 묻던 때가 있었다. 1970년생 학생끼리 비교했을 때 ‘보스턴 C 학점이 낫다’는 응답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학·과학 경쟁력이 더 중요해진 지금 와서 다시 묻는다면 ‘상하이 A 학점’의 삶이 여전히 큰 미-중 간 국력, 사회 환경의 차이를 뛰어넘어 더 탄탄할 것이란 의견이 크게 늘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미국 성인의 절반쯤인 대학 경험자에 대한 것이었다. 고교 중퇴(13%)나 고졸(33%) 학력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비교해 볼 이유가 없을 정도로 관심 밖 존재였다. 그러던 걸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해 판을 뒤집었다. 노동자층 몰표를 받고 당선된 트럼프가 동맹국 정부와 기업을 압박해 천문학적인 대미 투자를 빼앗다시피 받아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그 결과 1억 명이 넘는 블루칼라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은 정말 나아질까.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생기겠지만, 그 정도론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보고서가 많다. 결국 미 기업인 스스로가 미국 땅에 공장을 지을 때라야 제조업이 부활하는데, 미국 스스로가 머뭇거리고 있다. 젊고 저숙련 노동자일수록 지각·결석·이직이 잦은데, 이는 미국이 경험한 ‘100년의 풍요가 낳은 비극’으로 부를 만하다. 중고교 시절 최하층의 삶을 경험한 밴스 부통령이 자신의 저서에서 “일하려는 의지도 없으면서 일자리가 없다고 탓한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어쩌면 동맹 압박보다 더 중요한 게 오랜 안락함에 빠진 미국의 대각성 아닌가. 대통령이라면 흐름을 바꿔놓고 싶을 과제가 될 법하다. 하지만 포퓰리스트 대통령은 관심이 없다. 트럼프는 오히려 “이민자가 문제고, 중국이 뒤통수를 쳤다”며 지지층 귀에다 달콤한 이야기만 한다. 그렇다고 트럼프만 탓할 수 있을까.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치인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 밴스 부통령은 정치 입문 이후론 “노동자는 잘못이 없다”는 쪽으로 확 돌아섰으니 말 다 했다.

미국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6·3 선거를 앞둔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아서다. 선거가 선출직 권력자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꽃인 것은 분명하지만, 필요한 논의를 막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출마 희망자들은 정책 공약을 내놓은 뒤 이 사안이 왜 중요하고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 납득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선 손에 뭔가를 쥐여 드리겠다는 약속이 넘친다. 실현 가능성, 재원 조달 방안은 후순위로 밀리거나 꺼내지 않는다. “이런 정도는 유권자가 양보해야 합리적”이란 말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번 선거는 시도지사와 교육감을 16명씩 선출하는 것 외에도 국회의원 14명을 뽑는 종합선거다. 많은 주장과 담론을 찬반 토론에 부쳐 공통분모를 찾아낼 기회다. 하지만 선거 캠페인은 사소하거나 자극적인 이슈에 빠져들고, 과거 행적 평가가 미래를 압도하는 양상이다.

제1당은 “내란 세력 척결”을 1년 넘게 반복하고, 제2당은 “보수 재건” “정권 심판”을 내세우지만 선거 후 당권 판도에 마음이 더 가 있다. 조국, 한동훈 후보가 제3의 후보로 나선 경기 평택을, 부산 북갑 국회의원 선거에선 1, 2당 대표가 자당 승리보다 두 후보의 생환 여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하다. 교육감 선거는 어떤가. 이념 대립이 도드라지고, 현금을 나눠 준다는 공약이 넘친다. 공부 압박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조기 영어 부담을 어떻게 풀어줄지, 수학 문제 풀이에 지금처럼 매달리는 게 맞는 건지 청사진을 제시하는 이들이 안 보인다.

우리는 이 정도에 맴돌 수밖에 없나. 선거는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 더 큰 권력을 향한 게임이자 전쟁으로 전락했다. 또 한 번의 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이젠 이런 걸 문제라고 여기는 이들조차 줄어들고 있다. 트럼프가 블루칼라의 일하는 의지 고취 필요성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피하는 것처럼 우리 정치인들도 지방소멸 시대의 지방 자생력 확보, 학령인구 감소 시대의 학교 통폐합 등 누군가가 불편하고 손해를 볼 만한 사안을 외면하고 있다. ‘진짜 토론 주제’의 실종 앞에 무력감을 삼키게 된다.

그렇다고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투표를 포기해선 곤란하다. 엉터리 같은 정치에 질려 찍을 정당이 없다고 좌절하는 이들이야말로 정치 정상화를 기대하던 유권자이고, 시시비비를 가려 가며 정치를 바라보던 중도층 아니겠나. 이들이 투표장을 떠난다면 그건 맹목적 진영정치 추종자들의 목소리만 더 영향력을 얻도록 하는 일이다.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순 없다.

#미국 노동자#블루칼라#제조업 부활#트럼프 대통령#미중 경쟁력#선거 공약#정치 토론#지방 소멸#교육감 선거#유권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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