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인정하니 갑옷이 생겼다, 예술가의 생존법[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21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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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디 차, <할머니들>, 2022년. 사진: 앤디 키트(Andy Keate), 화이트채플갤러리(Whitechapel Gallery) 제공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글로벌 미술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밀레니얼 작가 제이디 차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마고할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그 후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간 제이디 차는 지난해 하우저앤워스 뉴욕 갤러리 그룹전에 참가했습니다. 현재 영국 런던의 공공미술관인 화이트채플에서도 한옥을 모티프로 한 설치 작품을 전시 중이죠.

타데우스 로팍이 서울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첫 단체전에도 정희민, 한선우 작가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 어머니의 고향을 다시 찾은 제이디 차의 이야기를들려드리겠습니다.

타데우스로팍 서울 그룹전 ‘지금 우리의 신화’에 전시된 자화상 ‘귀향’ 앞에 선 제이디 차.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입구를 지나 내부로 가면 정면에 제이디 차의 자화상 ‘귀향’이 보입니다. 그림 속 여자는 부엌칼과 배추김치가 그려진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소라를 마치 투구처럼 쓰고 있죠.

현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색 사이로 여자는 관객을 똑바로 쳐다봅니다. 마치 귀신과 소통하는 영매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거센 기가 흘러 넘치는 그림의 주인공, 제이디 차는 검은 드레스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말도 걸기 어려울 듯한 겉모습인데, 기자 간담회가 시작되고 현장에 모인 기자들이 자신을 응시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오 마이 갓, 전부 다 나를 쳐다보고 있네요!”

낯설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의외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말하지 못해 죄송하다. 꼭 다음엔 한국어로 말하고 싶으니 나에게 재밌는 예능이나 드라마를 추천해달라”고 너스레를 떤 그녀는 이내 불안감을 털어버리고 작품을 설명해 나갔습니다.

단단한 껍질의 소라, 날카로운 부엌 칼, 피가 흐르는 듯한 김치. 이렇게 드센 겉모습 아래 감춰진 반전의 부드러운 모습. 현장에서 드러난 그녀의 성격은 작품과 꼭 닮아있었습니다.
마고할미, 바리공주, 조각보는 영감의 원천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는 제이디 차의 설치 작품 ‘가택 신, 동물 수호자와 용서를 위한 5개의 길’, 사진: 앤디 키트(Andy Keate), 화이트채플갤러리 제공

위 사진은 제이디가 영국 런던의 공공미술관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설치 작품의 모습입니다. 한옥의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 전시장 속에 집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집의 가장자리와 바깥 부분을 덮고 있는 사각형의 색면들입니다. 미술계 사람들은 이 모양을 보고 ‘몬드리안의 추상’을 흔히 떠올립니다. 그러나 제이디가 영감을 얻은 것은 미술사에 기록된 예술가가 아닌, 이름 모를 한국의 여자들이 만든 ‘조각보’입니다.

제이디는 기자 간담회에서 “예술의 형태로 인정 받지 못했던 예술하는 사람들에 관심이 있다”며 “테두리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들여와 전복시키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조각보와 보자기를 만드는 방법은 엄마가 딸에게, 또 그 딸이 딸에게 가르쳐 주었지요. 이름은 남지 않았지만, 조각보 예술은 입과 손으로 전해진 셈입니다. 제이디는 이런 것들을 작품에 적극 끌어들여 예술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그녀가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로 선보였던 ‘마고 할미’도 이런 기록되지 않은 여신입니다. 마고할미는 오줌으로 강을 만들고 똥으로 산을 세워 한반도를 만들었다고 설화를 통해 전해져왔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지역에 가면 마고할미 신당, 폭포 같은 장소가 있죠.

다만 마고할미 신화는 ‘인정된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도 부족하며, 그나마 어린이 동화의 재밌는 이야기 정도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고할미를 다시 창조신으로 소환한 것이 제이디의 퍼포먼스였습니다.

런던 전시에서는 인간과 귀신을 연결하는 ‘바리공주’를 주된 테마로 삼았습니다. 한국에도, 캐나다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자신이 마치 바리공주와 같다면서요.

런던 전시장의 작품 속 바리 공주. 사진: 앤디 키트(Andy Keate), 화이트채플갤러리 제공
런던 전시장의 작품 속 바리 공주. 사진: 앤디 키트(Andy Keate), 화이트채플갤러리 제공
연약함을 인정하며 만들어진 갑옷

타데우스로팍 전시전경

이런 맥락에서 다시 그녀의 작품을 보면, 자화상 속 등장했던 인물은 마치 ‘모든 약한 존재들을 대변하려는 전사’처럼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 받았던 모든 것들을 몸에 이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한 당당함은 허세나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나의 불안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왔기에 더욱 매력적입니다.

4년 전 인터뷰에서 제이디는 “캐나다에서 자랄 때, 캐나다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온전한 내 것 같지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단단한 뿌리를 찾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돌고래, 갈매기 같은 캐나다의 요소와 조각보, 마고할미 같은 한국의 요소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결합해 새로운 ‘개인적인 신화’를 창조하기에 이릅니다.

그 신화에는 과거의 것뿐만 아니라 힙합 문화를 연상케 하는 패션 디자인 등 시공간을 초월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한국인이라고 할 지라도 흑인 음악에서 감동을 받거나, 멕시코 요리에서 깊은 맛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그녀는 세상이 정해준 정체성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불안할 지라도 우리 모두는 ‘오로지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삶을 헤쳐나가야 함을 인정합니다. 그런 불안 속에서 약해 보이는 속살을 감싸줄 단단한 껍질을 차곡차곡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제이디의 작품을 보며, ‘나의 신화’는 무엇인지 한 번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제이디 차, ‘대구의 딸들’, 2021년, 2021 130 × 110 cm  Hand sewn, bleached and dyed denim, oil on linen. 사진제공: 화이트채플 갤러리
제이디 차, ‘대구의 딸들’, 2021년, 2021 130 × 110 cm Hand sewn, bleached and dyed denim, oil on linen. 사진제공: 화이트채플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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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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