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칼바도스 한 잔[정기범의 본 아페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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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파리에서 북서쪽을 향해 차로 2시간 정도 달리면 해변 도시 도빌에 이른다. 이 도시가 위치한 노르망디로 향하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런 풍경들은 이 지역 특산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소나 양에서 생산되는 치즈와 버터 같은 낙농 제품은 최고의 지역 효자 상품이고, 사과로 만드는 사과 주스나 사과주인 시드르 그리고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와 칼바도스(사진)도 유명하다.

술 좀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생소한 칼바도스는 ‘오드비(Eaux de vie)’의 한 종류다. 오드비란 곡물, 견과류, 특정 과일을 증류해서 만드는데, 포도주 양조 시 포도를 으깨거나 통에 담을 때 생기는 건조 잔류물로 제조한다. 물론 칼바도스에서 생산되는 칼바도스의 주재료는 포도가 아닌 사과 또는 배이다.

칼바도스는 1553년 코탕탱 지역의 질 드 구베르빌의 일기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는 사과 40여 종의 증류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칼바도스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명성에 밀려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19세기 말 포도나무 전염병 ‘필록세라’가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시키면서 와인 대체품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포도에 비해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사과를 재료로 한 덕분에 주목받은 것이다.

칼바도스는 1942년에 소비자가 안심하고 상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원산지를 통제하는 규정인 AOC를 받았다. 칼바도스는 전체 생산량의 75%를 차지하는 노르 칼바도스와 페이도주 지역에서 25%를 생산하는 칼바도스 페이도주, 그리고 1997년에 AOC를 획득한 칼바도스 동프롱테 등 세 종류로 나뉜다.

칼바도스의 제조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2018년 칼바도스 월드 챔피언을 거머쥔 로제 그루 양조장을 찾았다. 양조장에선 사과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들어와 사과를 토해냈다. 5대째 칼바도스를 제조하면서 페이도주 지역의 대표 양조장으로 이름을 알린 이곳에서는 3개의 작은 알랑비크 증류기에 참나무 숯을 때어 증류시키는 방식으로 칼바도스를 제조한다. 24시간 불을 지피고 몇 달에 걸쳐 알코올 함량이 5∼7도에 이를 때까지 1차로 발효해 ‘프티 오’라는 알코올 도수 30%의 결과물이 생산된다. 이것을 400여 개의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숙성을 하면 칼바도스가 완성되는데, 보통 12년, 18년, 25년, 40년산으로 만들어진다.

칼바도스는 치즈, 초콜릿 또는 디저트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얼음을 넣지 않고 실온에 마시는 것이 이 술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는 방법이다. 구운 사과, 향신료, 그리고 말린 과일 향을 자아내는 18년 이상 칼바도스를 블렌딩한 칼바도스 한 모금을 삼킨 후에 사과 타르트를 한입 베어 물면 금상첨화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기에 이보다 좋은 알코올은 감히 없다.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칼바도스#가을#오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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