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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무비줌인]‘K벽지’ 전성시대

입력 2022-10-06 03:00업데이트 2022-10-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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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작 영화, 드라마의 특징은 벽지 등 세트장을 디자인하는 미술감독의 역량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벽지 장인’들이 뭉쳐서 만든 영화 ‘외계+인’ 1부 속 장면. CJ ENM 제공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가 밋밋한 흰 벽지 앞에서 연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깔’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대부’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마피아 영화가 옛날 한국 조폭 영화에 비해 분위기가 더 중후하게 느껴지는 건 보스 방에 붙은 벽지 품질 차이가 한몫한다.

벽지는 미감 때문에도 그렇지만, 감독의 미장센(화면 속 등장인물이나 사물의 주도면밀한 배치를 통한 연출) 속에서 스토리텔링과도 결합하기에 중요하다. 즉, 어떤 영화는 벽지로도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 영화를 볼 때 벽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3년 ‘올드보이’부터인데, 이 영화 주인공이 15년간 갇혀 사는 방, 붉은 톤에 기하학적 무늬가 천장까지 이어지는 벽지는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촘촘하게 반복되는 벽지 패턴은 주인공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군가가 설계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게 될 불가피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래로 20년간 적어도 대작으로 불리는 영화·드라마는 벽지를 포함한 세트 요소에 감정과 스토리를 담는 심오한 디테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에서 벽지가 중요해진 시점과 오늘날의 한국 영화 전성기가 맞물리는 만큼, 한국 영화·드라마가 인기 정점에 이른 건 상당 부분 K벽지 공이라고 봐도 된다. 최근 영화를 보고 난 뒤 주변에 “벽지 봤어?”라고 말하면 십중팔구 그 영화 좋다는 뜻이어서, 미술 요소가 부각된 요즘 시기를 K벽지 시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K벽지 시대의 핵심 기수는 ‘올드보이’부터 박찬욱 감독과 합을 맞춘 류성희 미술감독이다. 영화계의 대표적인 벽지 장인으로, 한국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미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류 감독은 2016년 ‘아가씨’로 칸영화제 벌컨상(최고기술상)을 받았을 때 K벽지 미학이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영화에서 응접실과 침실의 영국풍 벽지 속 패턴 간격은 넉넉해 보이지만 조밀하게 배치된 소품들과 맞물리면서 잘 정돈돼 있는 와중에도 묘하게 신경질적인 기운을 풍긴다. 그렇게 주인공 이즈미 히데코(김민희 분)의 내면 풍경이 공간에서부터 엄습한다.

영화 팬들은 이제 류 감독의 최고 벽지 미학으로 아가씨보다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을 꼽는 분위기다. 주인공 송서래(탕웨이 분) 집의 푸른 색감 벽지는 산과 바다의 질감을 표현한 회화에 가까워 보인다. 벽지의 이미지는 산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 나가는 영화의 내용과도 겹친다. 벽지가 감정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를 요약하고 압축한다. 류 감독 이래로 미술감독이 어떻게 영화를 해석하느냐, 영화와 대중적인 취향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만들어 내느냐가 영화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됐다.

또 다른 벽지 장인으로 미국 아카데미 미술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된 ‘기생충’ 세트를 만든 이하준 미술감독도 있다. 연출 중에선 최동훈 감독도 알아주는 미려한 벽지 미장센의 달인인데,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올해 중반 개봉한 ‘외계+인’ 1부는 최 감독 연출에 미술감독으로 류 감독과 이 감독이 합류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가졌던 이가 많다.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벽지 자부심은 너끈히 지켜냈다. 그러고 보면 올해 영화계는 K벽지 대전이었던 셈. ‘버닝’으로 2018년 칸영화제 벌컨상을 받은 신점희 미술감독도 영화계에서 벽지 장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대작 드라마도 벽의 색감이 오래 뇌리에 남을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벽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최근 에미상 6관왕 수상 영예를 안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거대한 게임장도 꼽을 수 있다. 세상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단절돼 있는 거대한 벽체는 출구 없는 삶과 잔혹한 게임의 룰을 상기시킨다. 여기에 게임장 속 벽과 계단을 채운 분홍과 노랑, 민트 등의 밝은 색 조합을 통해 게임의 괴기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이 작품의 세트장을 디자인한 채경선 미술감독도 미국 에미상 프로덕션 디자인상을 수상하면서 K벽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은 배우들의 연기와 세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병한 미술감독이 전북 전주에 세트로 구축한 유럽풍 호화 저택과 차이나타운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K벽지 장인들의 세트에선 기존 한국 영화·드라마에 없던 풍경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고민이 엿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다른 고전적인 이미지들을 끌고 와서 뒤섞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비주얼을 만들어 낸다. 기댈 수 있는 전통이 없는 가운데 탁월한 레퍼런스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독창성까지 나아간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다른 K컬처의 성공 공식과도 닮아 있다. 가사로는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나”라면서도 웃으며 칼군무를 추는 혼종 K팝을 흥얼거리다가 때론 어깨춤까지 추게 되는 것처럼, 무국적성의 비주얼은 K콘텐츠의 핵심 이미지로 세계인의 뇌리에 남아 맴돌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K콘텐츠가 또 늘었다는 의미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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