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전직 국정원장의 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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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원장 14명 중 11명이 檢수사 받아
해외 기관의 협조가 필수인 시대에 역행

정원수 논설위원
정원수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스탠딩 오더’라는 것이 있다.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명령을 말한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에 대한 암살 명령이 대표적이다. 김정은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정보기관장인 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서도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전 원장이 김정은을 겨냥해 북한에 침투시킨 공작 요원들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엔 이 전 원장에게 경호팀이 붙었을 만큼 긴박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이 전 원장에 대한 경호가 필요 없다.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가 해제된 게 아니라 이 전 원장이 수감 중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 2년 동안 국정원 특수활동비 21억 원을 상납한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원장은 구속과 석방을 되풀이하다가 징역 3년 6개월의 대법원 확정 판결로 지난해 7월 재수감됐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북한군에 끌려가서 손톱, 발톱 다 뽑히는 것보다는 대한민국의 감옥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으냐”고 주변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한다고 한다.

이 전 원장은 영어 교관으로 군에서 복무하다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국정원 해외 파트에서 40년 넘게 근무했다. 은퇴했다가 75세 때 국정원장에 취임한 이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를 전범 삼아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관행을 뿌리 뽑으려고 했다. 대표적인 대북 매파인 그는 “선진국 어느 나라 정보기관도 권력기관으로 불리지 않는다”며 국내 정치가 아닌 대북 관련 첩보 수집과 공작을 강조했다.

국내 정치를 멀리하려고 했던 이 전 원장도 퇴임 뒤 특활비 상납 관행에 발목을 잡혔다. 구속 직후 충격을 받은 그는 면회 온 지인 앞에서 눈물을 한참 동안 흘렸다고 한다. 이 전 원장을 포함해 보수 성향의 박근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장 5명이 모두 특활비 문제로 기소됐다. 진보 성향 정부의 전직 국정원장도 도청과 대북송금 등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과거 정부의 비정상적 운영을 바로잡겠다며 국정원 쇄신에 나섰던 문재인 정부의 서훈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최근 국정원에 의해 고발됐다. 정보기관이 1999년 국정원으로 간판을 바꿔 단 뒤 전직 원장 14명 중 11명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검찰 수사의 반작용으로 국정원은 국내 파트의 역할을 조금씩 축소하다가 결국 국내 담당 차장까지 없애면서 대북과 해외 정보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요즘은 북핵 등 현안이 생길 때마다 해외 정보기관과의 협조 없이는 진상 파악이 쉽지 않아 무게중심이 앞으로 해외 쪽으로 더 기울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5년 전 적폐청산 수사로 국정원 서버를 통째로 열어젖히면서 다른 나라 정보기관의 협조에 상당 기간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에야 어느 정도 원상 복구가 됐다고 한다. 해외 정보기관의 협조 내역이 혹시라도 공개되는 것 아니냐며 정보 공유를 꺼렸다는 것이다. 교훈도 일부 얻었지만 잃은 것도 그만큼 컸던 국정원의 과거 청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그마한 정보라도 얻기 위해 수시로 이합 집산하는 정보 전쟁에서 다른 나라에 주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받을 수만은 없다. 국정원장 수사가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면 정보 전쟁에서 앞서가지 못하고, 뒤처질 수밖에 없다. 국정원에 대한 검찰 수사는 국정원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임계점까지만 유용하다. 정보기관에도, 국가 안보에도 도움이 되는 검찰의 신속하고 절제된 수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전직 국정원장#국내정치#스탠딩 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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