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얼굴을 볼 수 있는 스승의 날![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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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나에겐 멋진 스승이 한 분 계시다. 유학 시절 지도교수 연구실은 내 연구실과 같은 층에 있었다. 평소에 많이 소통하고 지냈지만, 서로 바쁠 때는 편지와 메모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집에 가기 전 장문의 연구 리포트를 지도교수 연구실 문 앞에 붙여놓으면 답장이 그다음 날 연구실 문 앞에 붙여져 있었다. 만년필로 쓴 멋진 답장이었다. 내가 한 실험 결과에 대한 꼼꼼한 코멘트는 항상 기다리던 즐거운 편지와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새벽까지 실험하고 있었다. 새벽녘 지도교수가 실험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그날 그분과 아침이 올 때까지 이야기했다. 사는 문제, 연구, 연구비, 물리학, 가족, 인생 등등. 장례식을 치르고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학교에 나왔다고 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지도교수에게 들었던 것들은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있다. 어떻게 물리학자가 되고 어떻게 좋은 어른이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 그날 이후 나는 더 열정적으로 연구에 임했던 것 같다. 한 사람에 의해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청년의 물리학자처럼.

서울에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아침 일찍 연구실에서 학생들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연구실의 규칙 같은 중요한 의식이었다. 연구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연구실 운영 이야기, 앞으로 해야 될 연구 등등. 이 아침 시간이 하루의 중요한 시작이기도 했고,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잠들기 전 실험실을 지키는 학생들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친구들이 졸업을 하면 마치 마음을 다 준 애인과 헤어진 사람처럼 속앓이를 하곤 했다.

양자역학의 문을 연 닐스 보어와 불확정성 원리를 밝힌 독일의 최고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사제지간이었다. 1922년 6월 어느 날, 노벨상을 받은 보어는 강연을 하기 위해 독일 괴팅겐 대학을 찾았다. 그날 그곳에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 3학년인 스무 살 하이젠베르크도 있었다. 발표가 끝나자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받은 보어는 당장 답변하기 곤란하니 나중에 별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은 교외에서 만나 산책을 하며 긴 토론을 벌인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사제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보어는 하이젠베르크를 자신의 연구소로 초청했고, 두 사람의 공동 연구가 시작됐다. 이 두 사람의 연구로 원자 구조를 밝히는 양자역학의 체계가 완성된다. 10년이 흐른 후 1932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아버지 같은 스승과의 만남이 이뤄낸 결실이었다.

올해 미루던 스승의 날 행사를 제자들과 하기로 했다. 장소는 학교 앞 단골 삼겹살 집. 이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는 어른이 된 제자들. 그날이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애틋해지기도 한다. 마치 헤어진 옛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스승의 날#제자들 얼굴 볼 수 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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