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잡은 손, 둘이 함께하는 기도[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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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손을 본다는 것

얼리샤 시바사 박사의 19세기 말 저서 ‘생명의 서’에 실린 손의 도상(위 사진). 18세기경 오스만제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도장. 꾸란 관련 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손가락을 낄 수 있는 고리가 부착돼 있다. 사진 출처 The Public Domain Review·Michael Backman
얼리샤 시바사 박사의 19세기 말 저서 ‘생명의 서’에 실린 손의 도상(위 사진). 18세기경 오스만제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도장. 꾸란 관련 구절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손가락을 낄 수 있는 고리가 부착돼 있다. 사진 출처 The Public Domain Review·Michael Backman
사람의 신체 중 어느 부위가 가장 많은 정보를 줄까. 목일까? 거북이도 아니면서 거북목을 가지고 있으면, 그가 평소 컴퓨터 화면을 얼마나 오래 들여다보는지 말해준다. 피부일까? 사람의 피부 상태는 그 사람의 건강 상태와 스트레스 정도에 대해 일정한 정보를 준다. 뭐니 뭐니 해도 육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 자기는 이목구비보다 육질을 보고 데이트 상대를 결정한다고. 아무리 그래도 얼굴만 하겠는가. 타고난 이목구비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습관적 표정이 반죽해온 얼굴의 굴곡이 있기에, 얼굴은 보는 이에게 무엇인가 전달해준다. 그래서 관상을 본다는 것 아니겠는가.

얼굴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눈동자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눈동자는 그 사람의 악을 덮어두지 못한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가슴속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사람 말을 듣고 그 사람 눈동자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자기 속을 숨기겠는가?”(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모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수哉.) 왜 눈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일까. 눈은 눈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 대해서도 정보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얼굴 버금가게 손도 그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준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신분의 증명이나 확인을 위하여 수결(手決)을 사용하고, 또 손금을 보았던 것 아니겠는가. 손금을 보는 사람이 손금만 보겠는가. 손을 쥐어 보면 그의 노동 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야외에서 손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지, 실내에서 펜을 쥐고 일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손이 반죽해 온 손바닥 굴곡이 있기에, 손은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을 전달해준다. 시인 정지용은 ‘카페 프란스’라는 시에서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거칠어야 할 시대에 거칠어지지 못한 흰 손은 때로 부끄럽다. 흰 살 생선은, 아니 흰 살 인간은 때때로 슬프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과 동시대를 산 것으로 알려진 얼리샤 시바사 박사는 ‘생명의 서’라는 특이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는 인간 심신에 관련된 여러 지식과 희한한 아이디어를 짬뽕하여 만든 도상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 도상은 대개 머리, 얼굴, 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머리, 얼굴, 손의 도상은 마치 인간의 비밀 정보를 응축한 소우주처럼 보인다.

머리나 얼굴보다 손이 오히려 더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는 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처에 관한 정보다. 손은 머리나 얼굴에 비해 보호를 덜 받는 부위다. 손이 얼굴을 막아주는 경우는 있어도, 얼굴이 손을 막아주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로서 손은 자주 위험한 상황에 노출된다. 그래서 손은 크고 작은 상처와 흉터투성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에도 흉터로 얼룩진 손이 나온다.

자신을 사이코패스라 여기는 소년과 반항아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한 장면. 제임스(왼쪽)는
 왼손의 상처를 보이기 싫어 자기 왼편 앨리사의 손을 잡을 때도 오른손을 내민다. 깍지 끼고 맞잡은 손은 둘이 함께하는 기도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IMDb
자신을 사이코패스라 여기는 소년과 반항아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한 장면. 제임스(왼쪽)는 왼손의 상처를 보이기 싫어 자기 왼편 앨리사의 손을 잡을 때도 오른손을 내민다. 깍지 끼고 맞잡은 손은 둘이 함께하는 기도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IMDb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주인공은 두 명의 부적응 청소년, 제임스와 앨리사다. 이들은 세상과 지속적인 불화 중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다만 어렸을 때, 제임스의 엄마가 자살했다. 제임스는 차를 몰고 호수에 빠지는 엄마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어렸을 때, 강에서 자살한 어머니 시신을 건져내는 과정을 다 지켜본 것처럼. 그 이후 제임스의 행동은 마치 초현실주의 행위 예술과도 같다. 제임스는 세상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잃는다. 보통 사람과 달리, 제임스는 뜨거운 물에 한참 손을 넣고 있어야 비로소 뜨겁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결과, 그의 왼손은 큰 화상을 입는다.

이상한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마음의 화상을 입은 앨리사와 손에 화상을 입은 제임스는 마침내 집을 떠난다. 뜨거운 물에 손을 집어넣듯이, 세상 속에 자신을 집어넣는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는 이 이상한 두 청소년이, 그들보다 더 이상한 세상 속에서 좌충우돌하다가,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화상 흉터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임스도 안다. 그래서 자기 왼쪽에 앉은 앨리사의 손을 잡을 때조차 제임스는 왼손이 아니라 흉터 없는 오른손을 내민다. 마치 흉터가 부끄러운 과거인 것처럼. 드라마의 결말부, 제임스의 사랑을 마침내 받아들이기로 한 앨리사는 팔을 뻗어 제임스의 왼손을 기꺼이 부여잡는다. 이 우주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흉터로 가득한 타인의 손을 잡는 일 같은 게 아닐까.

인간의 연애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키스의 순간도 아니고 성교의 순간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손을 잡는 순간이다. 깍지를 꼈다? 그것은 그 어떤 애정 행각보다도 의미심장하다. 깍지 낀 손은 아마도 키스와 포옹과 성교를 예고할 것이다. 그뿐이랴. 맞잡은 손은 기도하는 손과 같다.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둘이 함께하는 기도이다. 특히 그 손이 흉터로 얼룩진 손일 때, 그것은 사랑을 위한 기도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손#맞잡은 손#둘이 함께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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