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모양에 비친 내 마음을 읽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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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구름을 본다는 것은

풀밭에 누워 서너 시간 동안 하늘에 지나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보곤 했다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그는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누워서 구름을 본 것일까. 구름에서 아름다운 여인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영국 시인 셸리의 시집 구름 삽화에는 여인이 그려져 있다. 여인을 본 것이 아니라면, 바지 입은 남자라도 본 것일까. 러시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는 시 ‘바지를 입은 구름’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원한다면/한없이 부드럽게 되리라/남자가 아닌, 바지를 입은 구름이 되리라.”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거짓 거울’(1928년). 현실을 떠나고 싶은 눈에 세상 대신 구름이 가득히 담긴 것 같다. 사진 출처 moma.org
초현실주의 작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거짓 거울’(1928년). 현실을 떠나고 싶은 눈에 세상 대신 구름이 가득히 담긴 것 같다. 사진 출처 moma.org
“전 할 만큼 했어요.” 지친 나머지 이 세상으로부터 퇴장하고 싶을 때, 풀밭에 누워 지나가는 구름을 본다. 아무것도 집착할 필요 없다는 듯, 구름은 태연하게 자신을 무너뜨리고 다른 모양의 구름으로 변해 간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구름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구름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거짓 거울’에 나오는 것처럼, 현실을 떠나고 싶은 눈에는 세상 대신 구름이 가득하다.

구름은 소멸의 약속이다. 구름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16세기 중국의 사상가 왕수인(王守仁)은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완벽한 양심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세상에 들끓는 저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진상들은 다 뭐죠? 왕수인이라고 그 진상들의 존재를 모르랴. 그러나 왕수인이 보기에, 그들의 욕심 뒤에는 어김없이 도덕적인 양심이 있다. 다만 욕심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왕양명의 제자 우중(于中)이 나서서 정리했다. “양심은 안에 있으니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기심이 양심을 가리는 것은 마치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어찌 없어진 적이 있겠습니까(良心在內, 自不會失, 如雲自蔽日, 日何嘗失了).” 왕수인이 칭찬했다. “우중은 이처럼 총명하구나(于中如此聰明)!” 노력하기에 따라 인간의 이기심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기에, 이기심을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구름은 언제고 소멸할 수 있는 존재다.

알리스 브리에르아케의 글과 모니카 바렌고의 그림이 만난 그림책 ‘구름의 나날’(왼쪽 사진)에서 구름은 우울을 나타낸다.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가 1902년 펴낸 시집 ‘구름’에 담긴 디자이너 로버트 애닝 벨의 삽화. 출판사 ‘오후의 소묘’ 제공·사진 출처
 publicdomainreview.org
알리스 브리에르아케의 글과 모니카 바렌고의 그림이 만난 그림책 ‘구름의 나날’(왼쪽 사진)에서 구름은 우울을 나타낸다.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가 1902년 펴낸 시집 ‘구름’에 담긴 디자이너 로버트 애닝 벨의 삽화. 출판사 ‘오후의 소묘’ 제공·사진 출처 publicdomainreview.org
인간은 영원을 바라고, 소멸을 아쉬워한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과도한 욕심이나 지독한 우울감은 빨리 소멸하는 것이 좋다. 알리스 브리에르아케와 모니카 바렌고의 멋진 그림책 ‘구름의 나날’에서 구름은 우울을 나타낸다. “아침에 일어나면 햇살마저 가려 버린 구름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죠.” 어김없이 우울한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구름의 그림자는 어디에나 내려앉아요. 가장 아름다운 것에도.” 그렇다. 우울은 모든 것을 슬프고 어둡게 만든다. 밝은 햇살을 가리고 존재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 보니 구름은 걷혀 있어요.” 구름은 소멸의 약속이기에, 우울 역시 언젠가는 소멸할 것이다. 우울의 구름이 엄습하면,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속단하지 말고, “멈추어 기다리는 게 나을 거예요”.

이처럼 구름에 비유된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 ‘바지 입은 구름’마저도. 그러나 아주 사라져 버린다는 말은 아니다, 구름이 사라지고 화창한 날이 다시 오듯이, 언젠가 구름도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날이 다시 흐려질 것이다. 그래서 셸리는 시 ‘구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구름은 대지와 물의 딸이요/하늘의 보배/구름은 바다와 강가의 틈새를 지나가며/변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죠.”

구름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또 언젠가는 돌아온다. 구름은 보기에 따라 소멸하는 거 같기도 하고 영원한 거 같기도 하다. 구름에 담긴 뜻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이다. 구름 자체야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 그래서 도연명(陶淵明)은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구름에는 마음이 없다고 노래했다. “때마침 머리 들어 멀리 보니/구름은 무심하게 산봉우리에서 나오고/날다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가네(時矯首而遐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李之함)의 조카 이산해(李山海)는 도연명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관직에서 쫓겨나 은둔할 때 지은 ‘운주사기(雲住寺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얽매이지 않는 존재라면 구름만 한 것이 없는데, 구름마저도 마음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物之無累者, 無過於雲, 而亦不能無心).” 구름마저도 산정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일정한 경향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구름의 마음이다. 사물에 고유한 경향이 존재하는 한, 얽매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말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구름 같은 사물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인간이다. 마음을 잘 비워낼 수만 있다면, “만물과 서로를 잊을 뿐만 아니라 천지와 서로를 잊고, 천지를 서로 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잊을 것이다(不但相忘於萬物, 而與天地相忘, 不但相忘於天地, 而我自忘我)”. 구름은 있었다 없었다를 반복하며 산정에 얽매일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만큼은 노력 여하에 따라 훨훨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구름#모양#내 마음을 읽다#구름을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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