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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미국에 간 소련 카우보이[클래식의 품격/노혜진의 엔딩 크레디트]

노혜진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국장
입력 2022-03-29 03:00업데이트 2022-03-29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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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핀란드는 지리적으로 러시아 바로 옆에 붙어 있어 항상 민감한 상황인데 1980년대 후반 핀란드 코미디 록밴드 멤버와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만나 당시 몰락해 가던 소련을 풍자하고자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그룹을 만든다. 뮤직비디오 한 편을 만들 요량으로 의기투합한 이들은 단편 영화를 세 편이나 찍는다. 그러고 나서 만든 엽기 장편 모큐멘터리가 바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년)라는 로드 무비다.

매니저 블라디미르(마티 펠론패)를 포함한 밴드 멤버 모두가 검은 머리가 한 뼘 이상 앞으로 뾰족하게 나온 퐁파두르 스타일을 하고, 앞코가 뾰쪽한 검은 구두를 신은 점이 우선적 특징이다. 음악은 아코디언, 튜바를 포함한 폴카 음악 스타일. 이들은 미국에 가면 뭐든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막한 툰드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전날 밤 밖에서 연습하다가 얼어 죽은 멤버 한 명도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이들은 후원을 받아 떠난다.

뉴욕에 도착한 이들에게 현지 에이전트는 먼저 매디슨스퀘어가든이나 양키스타디움에서 콘서트 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들의 연주를 듣고는 차라리 멕시코에 있는 자기 친척 결혼식 연주나 하라며 떠나 보낸다.

아홉 명이나 되는 이들은 중고 캐딜락을 타고 뉴욕에서 멕시코로 이동하는 동안 닥치는 대로 바에서 연주를 한다. 바 연주를 위해 로큰롤 스타일도 배우고 컨트리 음악 스타일도 배운다. 이런 노력에도 그룹은 인기를 얻지 못한다. 들어가기 전 ‘가수 구함’이라는 사인이 이들이 공연한 뒤에는 ‘바를 매매합니다’로 바뀔 정도다.

이들은 툰드라만큼 춥진 않지만 비슷하게 황막한 느낌의 미국 고속도로를 달리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다들 배고픈 와중 블라디미르만 시원한 맥주를 계속 들이켜는 등 그들을 착취해 혼자 비축해 둔 돈으로 호강하는 모습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다. 어릴 때 헤어진 친척을 뾰족한 머리 모양과 신발 모양으로 알아보고선 가수로 합류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힘겹게 도착한 멕시코에선 놀라운 일을 겪는다.

영화는 80분이 채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여러 인상적인 화폭에 엽기 유머와 괴짜 음악을 선사한다. 동시대 미국 독립영화 장인인 짐 자무시 감독이 중고차 판매업자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하는 등 소소한 재미도 있다. 여러모로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여운이 20년 넘게 남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최근 서울아트시네마가 정동길에서 재개관한 기념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회고전을 4월 3일까지 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비롯한 핀란드 거장의 대표작을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노혜진 스크린 인터내셔널 아시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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