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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사랑의 감정을 빼앗는 외계인[클래식의 품격/인아영의 책갈피]

인아영 문학평론가
입력 2022-03-15 03:00업데이트 2022-03-15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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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 문학평론가
일본의 극작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호러SF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이홍이 옮김·알마· 2019년)에서 망각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외계인의 침략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면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에서 외계인은 화려한 우주선에서 내려 신비로운 무기로 인간을 요란하게 죽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몰래 기생하고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 ‘기생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산책하는 침략자’는 한층 철학적이다. 인간의 육체가 아닌 개념을 죽이기 때문이다.

바닷가의 작은 항구 마을, 사이가 좋지 않은 젊은 부부 신지와 나루미가 주인공이다. 축제에 갔다가 사흘 동안 행방불명됐던 신지가 자기 이름도 알지 못하는 백치가 되어 돌아온다. 외계인이 신지의 인격을 점령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하는 나루미는 엄습하는 불안감에 두려워한다. “그렇게 자기만 전부 리셋하고 오면 다야?” 안 그래도 별거 수준이었던 사이의 남편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돌보기로 하면서도 나루미는 싸늘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우린 이미 옛날에 끝났었어.”

더 큰 문제는 신지가 인간의 개념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에게서 그 개념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지는 하루의 중요한 일과라며 산책을 나가서는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며 지구를 엉망으로 만든다. 나루미의 언니에게서 ‘혈연’이라는 개념을 빼앗자 가족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하고, 병원 관계자에게서 ‘자아’라는 개념을 빼앗자 면회가 금지된 병실이 열린다. 그러나 어떤 개념의 상실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소유’라는 개념을 빼앗긴 마루오는 느껴본 바 없는 후련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사랑에 있어서는 어떨까.

서로에 대한 나쁜 기억이 리셋된 신지와 나루미는 점차 관계를 회복하고 심지어는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신지가 침공을 마치고 지구를 떠나야 하는 순간, 그제서야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집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첫째, 사랑은 미움, 분노 등 다른 감정과 달리 동시적이고 양방향일 때 온전해진다. 따라서 상대에게서 개념을 가져오는 순간 불완전해지고 만다. 둘째, 사랑이란 개념은 아무나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빼앗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상대에게 사랑받을 수가 없다. 나루미는 결단을 내린다. “지금 신짱한테 그거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기면 남편 없이 혼자 남겨져도 슬프지 않으니까. 신지가 나루미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반대로 나루미는 사랑을 잃는다. 신지는 통곡하지만 나루미는 이해하지 못하고 웃는다. “왜 그래, 신지? 버림 받는 건 나야.” 이 어긋난 시차는 비극일까. 아니, 혼자 남겨져 사랑의 기억을 붙들며 연명하느니 깨끗하게 망각하기로 결심한 나루미에게 둘의 사랑은 그 순간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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