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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

입력 2022-03-18 03:00업데이트 2022-03-18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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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킨 필리핀 그룹 SB19. 타갈로그어로 노래하고 필리핀 신화 속 괴물을 노랫말에 넣어 자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쇼비티 제공
임희윤 기자
“자, 그럼 여러분께 소개 올리겠습니다! 동남아 순회공연을 방금 마악 마치고 돌아온! 따끈따끈한!”

왜 하필 동남아였을까. 잘 모르겠다. 어렸을 적 TV 개그 코너에 숱하게 등장한 저런 가수 소개 문구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그 어느 곳도 아닌 동남아를 순회하고 왔다는 게 암시하는 바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렇다. 동남아시아는 수동적 소비자이자 문화의 변방에 불과했다는 방증 아닐까. 당시 개발도상국이자 대중문화의 불모지에 가까웠던 대한민국의 관점에서도 쉽게 내려다볼 수 있었던….

#1. “국왕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이렇게 외치며 60대 후반의 백발이 성성한 푸른 눈의 기타리스트가 90도로 고개를 숙여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2014년 12월 20일 오후 태국 방콕시내 시리낏 왕비 국립 컨벤션센터. 인공호수에 특설된 50m 길이의 초대형 수상무대 위에 있는 인물은 미국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래리 칼턴이 확실했다. 그는 태국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상하의를 빼입고 심지어 가슴팍에는 태국 왕실 문장 무늬를 새겨 달고 있었다. ‘세계적 연주자가 태국 왕에게 이렇게까지 잘할 일인가’ 하고 생각할 무렵, 그가 더 놀라운 말을 꺼냈다.

“그럼 다음 곡으로는 푸미폰 국왕님의 작품인 ‘Candlelight Blues’를 연주하겠습니다.”

#2.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당시 태국 국왕은 재즈 마니아, 그 이상이었다. 일찍이 스위스에서 음악 공부를 한, 전문 재즈 색소포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스탠 게츠(1909∼1986), 베니 굿먼(1927∼1991) 같은 미국 재즈 거장들과도 협연한 바 있다. 칼턴은 아예 푸미폰 국왕이 지은 곡만 모아 연주해 앨범 하나를 낸 적도 있다. 그날의 공연 ‘스카이 재즈: 국왕 헌정 콘서트’는 칼턴,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 존 피자렐리, 다이앤 슈어, 윈터플레이의 화려한 출연진으로 4시간 동안 이어졌다. 가족 단위, 필부필부로 보이는 1만 명의 시민이 객석을 메우고 다소 난해한 재즈 공연에 집중해 경청하는 것도 장관. 한국의 콘서트 수준을 뛰어넘는 음향과 음질도 놀라웠다. 정작 국왕께서는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연 관계자는 그러나 최고의 공연 진행을 위해 긴장을 놓을 수 없다며 이렇게 귀띔했다.

“오늘 공연 영상을 국왕이 계신 병실로 가져가야 하거든요. ‘DVD로 구워 와! 병실에서 보게’가 그분의 분부입니다.”

#3. 별난 국왕의 기행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방콕의 재즈 클럽은 현지 연주자들의 높은 수준으로 이름났다. ‘동남아’가 결코 문화 변방과 동의어가 아님을 그해 겨울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왔다.

#4. 2PM의 닉쿤, 블랙핑크의 리사, 갓세븐 출신의 뱀뱀…. 태국 출신 멤버들은 그간 케이팝 세계에 풍요로운 재능을 아낌없이 선사했다. 2020년 데뷔한 한국 여성그룹 시크릿넘버에는 인도네시아인 멤버 디타가 있다. 자국 최초로 케이팝 멤버로 정식 데뷔한 디타는 이미 인도네시아의 국민 영웅이라고 한다.

#5. 얼마 전, 필리핀 그룹 SB19를 인터뷰했다. 지난해 톱 소셜 아티스트 부문에서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아리아나 그란데와 나란히 트로피를 다투며 동남아 가수 최초로 빌보드뮤직어워즈 후보에 오른 파란의 주인공이다. 작사, 작곡도 직접 하는 리더 파블로의 거침없는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필리핀에는 뛰어난 재능이 넘쳐난다. 시스템의 미비로 아직 드러나지 못할 뿐.”

#6. 동남아는 그간 케이팝의 가장 강력한 서포터였다. 한국, 일본에 비해 출산율이 높고 젊은층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참여도가 뜨겁다. 인구 대국도 많다. 인도네시아 2억7000만 명(세계 4위), 방글라데시 1억6000만 명(8위), 필리핀 1억1200만 명(13위) 등. 수많은 ‘좋아요’와 공유로 그쪽 젊은이들은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 싸이의 ‘강남스타일’,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까지 많은 케이팝 곡을 세계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7.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역시 팝 시장의 철저히 수동적인 소비자에 머물렀다. 클리프 리처드 내한공연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뉴 키즈 온 더 블록 공연장에 인파가 몰려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용필 유재하 이문세 서태지 등 청춘을 대변하는 스타가 생기고 팬덤이 두터워지면서 자국의 팝 산업이 눈부신 성장을 시작했다. 조만간 동남아에서도 폭발이 일어나지 않을까. 태국에서, 필리핀에서, 인도네시아에서, 티팝이, 피팝이, 아이팝이 만개하는 날, 우리 음악 시장이 총천연색으로 더 다채로워지는 날을 상상해 본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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