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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이인성의 ‘순응’을 오마주한 강요배[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입력 2022-01-25 03:00업데이트 2022-01-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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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가을 어느 날’(1934년), 캔버스에 유채, 96×161.4cm, 리움미술관 소장. 계절적 배경은 가을인데 등장인물들은 여름 옷차림을 하고 있다. 계절의 불일치가 모순의 시대를 암시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들판은 다소 어수선하다. 들판이라면 대개 같은 종류의 식물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만하다고 해야 할까, 불안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구부정하게 시든 해바라기 한 그루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이런저런 꽃나무들이 대충 자리 잡고 있다. 혼돈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젊은 여성과 소녀다. 길게 머리를 땋은 여성은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우두커니 서 있다. 멋진 바구니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다. 고개 숙이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 그는 왜 거기에 서 있을까. 이인성 화가의 ‘가을 어느 날’(1934년) 이야기다. 조선향토색론이 유행했던 1930년대, 시대의 표정을 담은 유화 대작이다.

조선향토색론은 무엇인가.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전은 으레 관학파적인 일본 화가를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다. 이들은 심사 기준으로 조선의 향토를 내세우며 이를 그리라고 권했다. 겉으로 듣기에는 아주 멋있는 말이다. 조선의 향토를 그려라. 그래서 그런지 농촌 풍경이 그림 소재로 유행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농촌의 피폐한 현실은 외면한 채 목가적으로만 그렸기 때문이다. 식민지 현실의 외면. 이는 동시대 화가들에게는 뼈아픈 지적 사항이었다. 조선향토색론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인성은 일제강점기의 스타 작가였다. 매년 봄마다 개최했던 ‘조선미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데다 어린 나이에 추천작가에 올랐기 때문이다. ‘가을 어느 날’과 함께 ‘경주 산곡에서’(1935년)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경주 그림은 숲에서 개간하고 있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면에는 패망한 천년 왕국의 신라문화를 배경으로 깔았다. 붉은색을 띠는 황토. 거기에 신라 기와를 노출해 영화를 누린 역사를 소환하고 있다.

‘가을 어느 날’의 경우 들판은 제목처럼 가을 풍경이지만 등장인물은 윗옷을 벗고 붉은 피부를 드러낸 여름날의 모습이다. 계절 불일치의 경우다. 모순의 시대임을 알려주고 있다. 적토(赤土), 숲조차 흔치 않았던 헐벗은 국토. 궁핍한 시대의 상처다.

제주 화가 강요배는 ‘어느 가을날’(2021년)을 그렸다. 1월 9일 막을 내린 대구미술관 ‘이인성 미술상’ 수상 작가 기념전 ‘강요배: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에 출품했던 대작이다. 이인성을 오마주했다. 하지만 두 그림의 형식과 내용은 사뭇 다르다. 이인성의 작품이 일종의 ‘연출된 풍경’이라면 강요배의 작품은 ‘현실 풍경’의 사실적 재현에 가깝다. 이인성은 순응(順應)의 풍경을 그린 반면 강요배는 저항의 풍경을 담았다.

강요배, ‘어느 가을날’(2021년), 캔버스에 아크릴, 197×333cm, 대구미술관 소장.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을 오마주한 작품으로, 1946년 10월 대구의 시위 현장을 담았다.
‘어느 가을날’은 1946년 10월 대구의 시위 현장을 재현한 작품이다. 친일 경찰의 행패에 저항하면서 “쌀을 달라”고 외치던 시민들의 ‘주장’을 모셔왔다. 아니, 절규를 담았다. 현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젊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하얀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더러는 구호를 적은 깃발을 들고, 또 누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역동적 장면이다.

강요배는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해 예술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당시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제주 민중항쟁사 연작, 특히 제주4·3사건의 ‘동백꽃 지다’ 계열의 작품은 대표작급이다. 뚝뚝 소리 내며 떨어지는 동백꽃으로 상징한 제주의 목소리는 울림이 컸다. 민중미술운동의 성과를 이룬 뒤 그는 고향 제주에 정착했다. 낙향 생활로 그는 자연과 가까워졌다. 캔버스에 제주의 거친 파도와 거센 바람소리를 담았다. 지극히 단순한 자연 현상, 그렇지만 조형적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대구미술관 전시장을 제주바람으로 가득 채운 강요배의 예술은 감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강요배의 또 다른 출품작 ‘산곡(山谷)에서’(2021년)는 상징성이 큰 작품이다. 화면의 대부분은 붉은 황토의 대지로 채웠다. 파헤쳐진 드넓은 땅은 이곳이 건축 현장임을 알려준다. 저 멀리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문제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근경의 젊은 사람이다. 그는 흙무더기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고통의 순간이다. 파헤쳐지는 땅, 그 붉은 적토에 머리를 박고 무슨 고뇌에 빠져 있을까. ‘산곡에서’는 이인성의 ‘경주 산곡에서’를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이다. 개간의 현장. 하지만 패망한 역사가 있고, 도시화 현상에 따른 자연 파괴의 현장이 있다.

대구는 한국 근대미술의 요람으로 유명하다. 평양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면서 숱한 작가를 길러냈다. 대표 작가로는 이인성과 그의 초등학교 동창생 이쾌대가 있다. 빈곤 가정 출신인 이인성은 6·25전쟁 당시 경찰에 의해 비명횡사했고 대지주 집안 출신인 이쾌대는 그 많은 재산을 버리고 월북했다. 이들 동창생의 운명은 분단시대를 상징한다. 여기에 강요배는 대구를 찾아 제주의 소리를 들려줬다. 바닷바람 소리, 싱싱하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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