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용관]‘명성황후 시해’ 편지

정용관 논설위원 입력 2021-11-18 03:00수정 2021-11-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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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자행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 영사관의 한 젊은 외교관이 본국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젊은 외교관은 시해 음모를 제대로 몰랐거나 좀 양심적이었을 순 있겠다. 시해 사건에 실제 가담했던 다른 외교관이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당시 정황을 밝힌 편지가 최근 발견된 것이다.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라는 이 외교관은 사건 다음 날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입은 내가 맡은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귀족 집의 안쪽에 있는 건물)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는 심경도 밝혔다고 한다. 오쿠고텐은 경복궁 후원 건청궁의 왕비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을 말한다.

▷명성황후 시해범은 민간인 신분의 ‘일본 낭인(浪人)’이란 것이 통설로 굳어져 왔다. 낭인의 본래 뜻은 ‘불법적으로 다른 곳을 유랑하는 부랑인’이지만,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군인이나 관료가 아니라 재야에서 ‘지사(志士)’인 체하며 정치 활동을 하는 패거리들이 스스로를 낭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들은 “민비를 죽이자”는 여론을 형성했고,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 공사도 부임하자마자 “‘여우사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며 실행에 나선 것이다.

▷명성황후 실제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 아니라 ‘일본군 소위’임을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도 발굴됐다. 일본은 사건 직후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라고 보고했다.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그 다음에 나카무라(낭인)도 하수(손을 대어 사람을 죽임)했는데…”라는 보고도 있다. 그러다 “어느 일본인이 살해”라고 시해범을 흐리기 시작했다. 시해범은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라고 한다.(이종각 저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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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신은 ‘홑이불로 싸서 송판 위에 올려’ 녹원으로 옮겨져 다른 궁녀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두 개의 칼날인 것 같다는 증언이 있다. 일본의 한 신사엔 한 낭인이 살해도구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히젠도’가 보관돼 있는데, 칼집에 ‘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었다’는 뜻의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고 새겨져 있다. 낭인들은 서로 자신이 명성황후를 베었다며 ‘공(功)’을 내세우려 혈안이었다. 군인이든 외교관이든 낭인이든 무죄 혹은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다 풀려났다. 이번 편지 발견을 계기로 126년 전 참혹했던 시해 사건의 전말, 특히 일본 정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가 소상히 밝혀지길 기대한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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