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몸, 전사의 몸, 선지자의 몸[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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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영화 ‘듄’―몸을 본다는 것은

모든 사막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막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은 그래서 관람자를 압도한다. 영화 ‘듄’도 그렇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모든 사막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막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은 그래서 관람자를 압도한다. 영화 ‘듄’도 그렇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이 글에는 ‘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몸을 탐닉하는 영화 ‘듄’(砂丘)이 그리는 우주에는 동등한 국가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는 국제질서가 없다. 미래의 우주는 강력한 제국이 지배하는 곳이다. 제국이라고 해서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직접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봉건 귀족들이 제국의 뜻을 받들어 자신의 관할 행성을 다스린다. 약자들은 그 지배 아래서 목숨을 연명하고 때로 저항한다. 따라서 ‘듄’에는 세 종류의 정체(政體), 즉 정치적 몸이 나온다. 제국, 봉건 제후국, 그리고 프레멘이라고 불리는 약자들의 공동체.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 ‘듄’은 약자들이 메시아와 함께 힘의 역전을 가져오는 드라마다.

이 지배와 저항의 드라마 서두에 세 남자의 육체가 있다. 하코넨 남작(스텔란 스카스가드)의 몸,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작)의 몸, 공작의 아들 폴(티모테 샬라메)의 몸. 드니 빌뇌브 감독은 영화 전반에 걸쳐 공들여 이 세 몸을 관객들에게 전시하고 탐구한다. 먼저 하코넨 남작의 몸. 200kg에 달하는 그의 몸은 지방의 스펙터클이다. 하코넨은 그 거대한 비곗덩어리를 반중력장치를 통해 간신히 지탱한다. 필요에 따라 거대한 풍선처럼, 아니 기괴한 허풍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 몸은 권력을 탐하는 하코넨의 욕망을 닮았다. 그의 몸은 먹고 또 먹어서 확장하는 제국의 몸이다.

하코넨의 공격을 받아 몰락하는 레토 공작의 몸은 근육의 스펙터클이다. 조각처럼 잘 발달된 근육질의 몸이다. 그의 몸은 안락의자에 앉아 탐식하는 권력자의 몸이 아니라, 몸소 전장에 나아가는 장군 같은 몸이다. 이 잘 단련된 전사의 몸이 하코넨의 계략에 빠져 벌거벗은 채로 의자에 묶여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그의 몸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형을 앞둔 균형 잡힌 몸의 찬란함을 보여주기 위해 레토 공작을 벗긴다. 카메라는 그 아름다운 몸에 한동안 머문다.

‘듄’의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 역의 티모테 샬라메(위 사진)와 폴의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 역의 레베카 퍼거슨.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듄’의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 역의 티모테 샬라메(위 사진)와 폴의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 역의 레베카 퍼거슨.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레토 공작의 아들 폴의 몸. 티모테 샬라메가 연기한 폴은 앙상함의 스펙터클이다. 소설 ‘듄’의 서두에서 노파는 폴을 보고 말한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작은 것 아니냐.” 실로 배우 티모테 샬라메에게 별 근육이 없다는 사실은 영화에서도 새삼 강조된다. 그렇게 근육이 없어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전사로 태어나지 않고 정치에도 큰 관심이 없는 폴. 하코넨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폴은 그 왜소한 몸을 가지고 복수에 나서야 한다.

이 몸들의 승부는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작은 몸이 큰 몸에게 패하게 되어 있다. 왜소한 사람은 거대한 사람에게 패하고, 소국은 제국에게 패하고,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게 되어 있다. 강한 자가 약자를 정복하고 영광을 얻는 것이 로마 제국의 서사이다. 그러나 니체가 말했듯이, 기독교적 서사는 다르다.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하는 게 아니라, 약자가 강자에게 승리하는 서사다. 약자가 강해져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약하기에 승리하는 서사다. 왜소한 사람이 거대해져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왜소한 사람이 왜소하기에 승리하는 서사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부강한 사람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만큼이나 어렵다. 메시아 폴은 그 왜소함을 가지고 이제 낮은 곳으로 임한다. 폴이 사막에서 저항하고 있는 약자들과 만나면서 영화 ‘듄’ 1부는 막을 내린다.

폴은 결국 승리할 것이다. 그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를 갖고 있기에. 선지자는 현실 공간에서 패배하되, 시간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갈 수 있다는 점에서 “한꺼번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자”이다. 기독교적 서사는 공간을 차지하기 이전에 먼저 시간을 장악한다.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찬란한 구원의 미래가 오리니. 그래서 성경에는 묵시록의 서사가 있고, 옛 사회주의에는 결국 도래할 공산주의의 서사가 있다.

이러한 ‘듄’의 서사를 압축하는 이미지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사막의 스펙터클이다. 땅 중에서 가장 가난한 불모의 지역이 사막이다. 헐벗은 몸으로서의 사막. 사막은 땅의 나체다. 사막은 땅의 원형 탈모다. 사막은 땅의 대머리다. 사막은 풍성함으로 스펙터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모로 스펙터클을 만든다. 약자가 약하기에 승리하게 되듯이, 사막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관람자를 압도한다. 그래서 사막은 부재의 스펙터클이다. 모든 사막 영화에서는 사막이 주인공이다. 데이비드 린이 감독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사막이 주인공이듯, ‘듄’에서도 사막이 주인공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카메라는 사막의 표면을 묵상하듯이 핥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과정을 오랫동안 응시하게 만든다.

끝으로 폴의 엄마를 연기한 배우 레베카 퍼거슨의 몸. 사막의 스펙터클이야말로 사막 영화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사막을 압도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심어 놓는 것 또한 사막 영화의 관습이다. 예컨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사막은 결국 주인공 피터 오툴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들어간 잡티일 뿐이다. 그렇다면 ‘듄’에서는 누가 그러한 절정의 아름다움을 담당하고 있는가? 세계적인 꽃미남이라는 티모테 샬라메인가? 그렇지 않다. ‘듄’에서 거대한 사막은 레베카 퍼거슨의 뺨에 묻은 모래알일 뿐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몸을 본다는 것#권력자의 몸#전사의 몸#선지자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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