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유죄 추정의 위험 일깨운 ‘곡성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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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신광영 사회부 차장
피해자는 17세의 지적장애 여성이었다. 그는 아랫집에 사는 50대 남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피해 진술도 구체적이었다. 아랫집 남성 김모 씨는 혐의를 부인했다. “피해자를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경찰과 검찰, 법원은 피해자의 말을 믿었다. 1심 법원은 2017년 김 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지적장애 2급인 미성년자를 집과 모텔에서 3차례 성폭행해 죄질이 나쁜데도 뻔뻔하게 범행을 부인한다며 무겁게 처벌했다.

김 씨에 대한 검찰 공소장과 법원 판결문에는 ‘피해자의 지적 능력에 비춰’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김 씨가 “피해자 진술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항변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피해자가 모텔 상호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럴듯하게 꾸며냈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피해자는 어려서부터 전남 곡성에서 고모, 고모부와 한집에 살았다.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정신장애인 시설에 있어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고모 부부는 조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사료 배달 일을 시켰다. 피해자는 학대와 폭행 속에 자랐다. 고모를 무서워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잠겨 있는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잠긴 문을 가해자가 어떻게 열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고, 경찰은 더 묻지 않았다. 경찰은 피해자가 범행 장소로 지목한 모텔을 답사한다면서 간판 사진만 찍고 왔다. 진술 내용이 맞는지 건물 내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모텔에는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이 남아있었다. 경찰은 이것도 살펴보지 않았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을 차에 태워 모텔에 갈 때 앞 유리에 내비게이션이 달려있었다고 했는데, 김 씨의 차 내비게이션은 앞 유리가 아닌 운전대 옆에 매립돼 있었다.

여러 의문에도 김 씨에 대한 유죄 판결은 2심 재판에서도 뒤집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고 기일을 며칠 앞두고 피해자가 법정에 나왔다. 당시 피해자는 고모 집에서 나와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다. 1년 넘게 홀로 사건을 파헤쳐 온 김 씨의 딸이 가까스로 피해자를 수소문해 사실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피해자가 증언대에서 한 말은 재판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저 아저씨가 아니에요. 고모부가 그랬어요.”

고모는 남편이 진범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도 조카에게 “아랫집 아저씨가 한 짓”이라고 진술할 것을 지시했다. 피해자는 “고모에게 맞으면 너무 아파서” 그 말에 따랐다고 했다. 피해자가 경찰 조사를 받을 땐 늘 고모가 보호자로 동석했다.

지적 능력에 비춰 진술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수사기관과 법원의 판단과 달리 피해자는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앞 유리에 내비게이션이 달린 차량은 다름아닌 고모부의 차였다. 경찰이 열어보지 않았던 모텔 CCTV에는 고모부가 피해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피해자의 진술을 조금만 성의껏 확인했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김 씨가 1년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피해자는 진범과 한집에 살아야 했다. 이후에도 성폭력이 지속되자 결국 도망쳤다.

검·경과 법원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꼈을 법하다. 범인을 단죄해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죄 추정의 유혹에 빠지면 냉철한 검증이 필요할 때 예단과 추정으로 빈틈을 메우게 된다. 그 결과 실체가 밝혀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벼랑 끝으로 더 내몰린다.

김 씨에겐 “반성하지 않는다”며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던 법원은 진범인 고모부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죄를 뉘우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게 감경 사유였다. 다만 무고죄가 인정돼 고모부는 징역 3년 6개월, 고모는 징역 7년에 처해졌다.

피해자가 보복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계속 징역을 살았을 김 씨는 2019년 1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옥살이를 했던 상처가 아물기는 어렵다. 성폭행범이라는, 이미 찍혀버린 낙인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올 6월 법원은 김 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며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고의로 오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사과를 받고 싶다는 김 씨의 요구에 경찰은 “검사가 기소했다”고 하고, 검찰은 “법원이 판단했다”고 하고, 법원은 “유감”이라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 낸 책임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됐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곡성 사건#유죄 추정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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