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운]이건희 유물 기증 빛 보려면, 정밀한 조사 연구 선행돼야

김상운 문화부 차장 입력 2021-05-27 03:00수정 2021-05-2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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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문화부 차장
“유물 등록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최근 이건희 컬렉션을 인수해 개관 이래 최대 경사를 맞은 국립중앙박물관(국박)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국박은 삼성가로부터 넘겨받은 2만1600여 점의 유물과 목록을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막대한 양의 컬렉션을 옮기는 과정에서 유물들이 서로 뒤섞일 수 있어서다. 유물을 수장고에 보관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물 등록’은 예산과 인력이 확충되는 내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물 등록은 단순히 관리번호만 매기는 게 아니라 실측과 재료 파악, 사진 촬영 등을 복합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에 따라 국박은 이건희 컬렉션 등록에만 최소 2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유물 등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함께 있어야 할 세트 유물이 따로 떨어져 보관되는 등의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4년 전 동그란 몸돌로 유명한 고려시대 홍법국사실상탑(국보 제102호)의 상륜(相輪·탑 꼭대기 장식)이 사라진 지 50여 년 만에 국박 수장고에서 뒤늦게 발견된 게 대표적이다.

박물관에 따르면 상륜이 세로로 반파(半破)돼 탑 위에 고정되지 않자 1960년대에 이를 분리 보관했다. 문제는 당시 유물 등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50년 넘게 존재가 잊힌 채 수장고에 방치된 것. 국박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촬영한 탑 사진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를 파악했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 사자상도 한동안 분실된 걸로 알려졌지만 국박 수장고에 보관된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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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물관에서 유물 등록 이상으로 중요한 건 ‘조사 연구’다. 소장품 연구가 새로 발굴된 고고 자료와 맞물려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밝혀낼 수 있어서다. 예컨대 국박은 2013년 금관총(金冠塚) 출토 둥근고리칼(環頭大刀·환두대도) 칼집에서 ‘이사지왕(爾斯智王)’ 명문을 발견했다. 이는 2년 후 금관총 재발굴 때 출토된 ‘이사지왕도(爾斯智王刀)’ 명문의 칼집 장식과 더불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였기 때문이다.

이건희 컬렉션의 비지정 문화재(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것) 중에도 수월관음도 등 희귀 유물이 상당수 포함돼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박 관계자는 “외부 연구자들과 함께 시간을 들여 찬찬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부 환경은 이런 분위기와 거리가 있다. 최근 약 20곳에 달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이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과열 양상으로 치닫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수도권에 이건희 미술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기증품을 제대로 보존해 국민들에게 문화 혜택을 돌려주는 게 기증자의 뜻이라면 미술관 설립을 서두르기보다 유물 관리와 조사 연구에 먼저 힘쓰는 게 순서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이건희#유물#조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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