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국적,선박의 선적[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48〉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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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첫 배에 승선했다. 선박이 라이베리아 깃발을 달고 있었다. 일본 선주가 실제 소유자라고 하는데 일본이 아니라 라이베리아에 등록됐다고 하니 이상했다. 사람이 태어나면 국적을 얻는다. 우리나라는 혈통주의라서 자식이 부모의 국적을 따른다. 미국은 그곳에서 출생하기만 해도 미국 국적을 부여하는 속지주의다.

선박도 건조되면 행정당국에 등록하고 선적(船籍)을 얻는다. 선박법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소유 선박에 한국 선적을 부여한다. 혈통주의에 비견된다. 우리는 속지주의를 택하지 않아서 우리나라에서 건조되는 선박에 한국 선적을 부여하지 않는다. 미국은 미국 건조 선박에도 미국 선적을 부여한다. 이렇게 선적 부여에는 선적 국가와 선박에 진정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연결고리가 전혀 없음에도 선적을 부여하는 편의치적(便宜置籍)이라는 제도가 있다. 파나마, 마셜제도, 라이베리아가 대표적이다.

유엔 해양법에 의하면 선박과 선적 사이에는 진정한 연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 연계 없이 자국에 종이 회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적을 부여하는 편의치적선이 세계 외항 상선의 약 70%를 차지하게 됐다. 각국이 이를 사실상 인정하고, 선주들이 이역만리 파나마 등에 배를 등록하는 이유가 무얼까?

선박을 이용하는 해운업은 국제 경쟁이 치열하다. 운임이 중요한 경쟁 요소다. 운송 원가에 선원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각국은 자국 선원 고용을 늘리기 위하여 강제로 승선시키게 하는 선원법을 만든다. 선진국일수록 선원 인건비가 비싸다. 파나마 등에는 선원에 대한 규제가 없다. 저렴한 임금의 외국 선원을 승선시키기 위하여 파나마에 등록하는 것이다. 최근엔 금융의 목적이 커졌다. 선주들은 선박 건조 시 은행으로부터 선가의 80%를 대출받는다. 금융채권 회수를 위해 은행은 선박에 대한 저당권자가 된다. 파나마 등에 등록하면 저당권자인 은행이 더 보호받는다. 그래서 금융권은 선박이 파나마 등에 등록되는 것을 선호한다.

1985년 파나마 선적에 한국 선원들이 탄 우리 배가 중국 친황다오(秦皇島)에 입항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비수교 관계였다. 그런데 중국 정부에서 상륙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배가 한국 선적이었으면 수교가 없었으니 입항이 아예 불가했을 것이다. 아주 싼값으로 맛있는 점심과 저녁을 먹고 만리장성까지 구경하는 데 10달러도 들지 않았다. 편의치적 제도 덕분이었다.

우리 조선소에서 건조된 선박이 우리나라에 등록할 수 있도록 선박법을 개정해 보자. 그리고 파나마 등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담은 특별법이 적용되는 선박등록특구를 서울 한강의 밤섬, 부산의 해운대, 인천의 송도 등에 두자. 그러면 우리는 세계 1위 조선국이라서 단숨에 세계 1위의 선박 등록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박은 우리 법이 적용되는 움직이는 영토이므로 우리의 지배력이 그만큼 넓어지는 효과도 있다. 등록세 등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세계 1위가 달성되는 분야가 하나 더 생겨나니 국격이 상승된다. 1석 3조의 효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국적#선적#해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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